컨텐츠 바로가기

05.23 (목)

교육계 확대되는 '시민감사관' 청렴도 제고 성과냈지만 자격·역량 문제로 '시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공공기관의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시민감사관 제도가 교육현장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 피감기관인 학교 관계자들은 시민감사관 위촉 절차를 강화해 자격 시비 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수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회계감사를 받은 한 고등학교의 A교사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회계감사 도중 한 감사관이 갑자기 시험지를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최근 시험지 유출이 잦다는 이유에서다. 회계 범위가 아니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교육청에서 함께 나온 다른 감사관의 중재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A교사에게 다른 교사가 시험지를 요구한 감사관은 교육청 공무원이 아닌 ‘시민감사관’이라고 귀띔했다.

시민감사관은 시민이나 외부 전문가를 위촉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을 감시하도록 하는 제도다. 시민의 눈으로 공공기관을 감시하고, 관행을 바로잡아 투명성을 강화하는 취지로 2010년부터 도입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했거나 관련 업계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전문가, 혹은 법조·회계 전문가 등을 위촉한다.

◇청렴도 제고 성과, 교육부도 확대 방침

시민감사관 활동은 실제 교육계의 청렴도 제고에 일조했단 평가다. 가장 적극적으로 시민감사관을 활용한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청렴도 평가와 부패방지 시책평가 결과 전년도보다 한 단계씩 오른 3등급, 2등급을 받았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은 경기도교육청 시민감사관은 한국투명성기구로부터 '투명사회상'을 수상했다.

안영훈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학부모가 감사에 참여해 교육 민원을 직접 다뤄 투명성과 행정서비스의 질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성과가 나타나자 교육부도 시민감사관을 적극 활용하는 계획을 세웠다. 교육부는 지난달 17일에 진행한 연세대학교 종합감사를 비롯해 정원 6000명 이상 사립대 16곳에 대한 감사에 시민감사관을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지자체가 아닌 중앙정부가 외부감사에 시민감사관을 활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내부 옴부즈만 성격으로 출범한 시민감사관이 학교를 직접 감사하면서 적잖은 잡음도 들려온다. 감사규정을 따르지 않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소송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다.

◇자의적 판단 앞세워 피감기관과 마찰

당장 시민감사관의 감사 대상이 된 대학은 불편한 기색이다. 감사 대상으로 지목된 한 대학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학은 중·고등학교와 달리 수십억원에 달하는 예산과 수천명, 수만명에 달하는 개인 정보를 다루는 거대한 기관"이라며 "전문성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시민감사관이 자의적인 지적을 내놓아 마찰을 빚진 않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시민감사관의 편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년 감사 대상에 이름을 올린 또 다른 사립대 교수는 "외부에서 사립대의 등록금 인상과 적립금 등을 비판해온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시민감사관이라는 완장을 차고 대학을 직접 들여다보는 셈"이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실제 대학에 앞서 시민감사관의 감사 대상이 됐던 학교나 유치원 등에서는 감사 방식에 대한 불만이 나온 바 있다. 지난해 8월 시민감사관이 포함된 지방 교육청의 감사를 받은 A 사립유치원 원장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감사에 파견된 시민감사관은 5년치 판공비 자료를 요구하고, 유치원 측이 이를 1t(톤) 화물차를 통해 전달하자 이번엔 엑셀파일로 정리해 오라며 돌려보냈다. 이에 불응하자 감사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며 고발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불법 녹취 사례도 있다. 경기도의 한 유치원을 감사하던 시민감사관이 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리 담당 교직원에게 접근해 비위 사실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며 동의도 없이 녹취를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시민감사관은 유치원장에게 비위 사실을 설명하면서 스마트폰에 녹취한 내용을 들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도 시민감사관의 자의적인 감사가 문제가 됐다. 회계감사를 벌인 과정에서 교비로 산 운동기구가 발단이었다. 시민감사관이 교사들이 사용하려고 샀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학교 측은 규정대로 했다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학교 관계자는 "분명 규정 위반 사항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사용한 기록까지 남겨놨는데 자의적인 판단으로 위법 운운해 황당했다"고 털어놨다.

◇교육당국 감사 늘리고 역할 규정 마련해야

잡음이 이어지자 개선이 필요하단 목소리도 커졌다. 우선 시민감사관의 감사 활동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법률을 제정해야 한단 지적이다. 현재 시민감사관을 설치할 수 있는 직접적인 법 규정은 없다.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3조 '공공기관의 책무'에서 공공기관은 부패방지에 노력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명시한 게 전부다.

이를 근거로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은 별도의 규정이나 조례를 마련해 시민감사관을 설치했다.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국민권익위는 시민감사관 가이드라인을 따로 정했다. 그러나 시민감사관의 역할에 대해 '법규 등 정해진 규정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 수준을 통해서도 판단할 수 있고 유연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어 도리어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비판이다. 서울시교육청 감사실에 근무했던 한 학교 관계자는 "감사는 매우 첨예한 현안이라 법과 규정에 따라 면밀하게 진행해야 한다"며 "규정에 근거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피감기관을 비판하는 것은 감사가 아닌 갑질"이라고 말했다.

자격 시비 등을 해소하기 위해 시민감사관 위촉 절차를 강화해야 한단 주장도 있다. 이형섭 한국사립학교행정실장협의회장은 "현재 위촉 방식은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좌우될 우려가 있다"며 "법률로 위촉 근거를 정하고 피감 기관의 고충을 대변할 수 있는 위원을 포함한 위촉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감사 대상을 학교에서 교육당국으로 확대해야 한단 제안도 나온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교육당국의 정책과 공약 등은 아직 시민감사관의 감사 영역이 아니다"며 "교육청 시책 등을 감사의 대상으로 포함해 시민의 눈으로 공공기관을 감시하는 제도 본연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재 조선에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