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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불굴의 인동초’ 키워낸 공간에 ‘평화의 김대중’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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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기억하는 3개의 공간]

12살때까지 흔적 ‘하의도 생가’

‘정치적 고향’이자 버팀목 목포

‘반독재 투쟁’의 근거지 동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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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하의도(34.63㎢)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2살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전남 목포항에서 하루 2편뿐인 차도선(차를 실을 수 있는 배)으로 2시간30분가량 걸린 이곳은 뭍사람들에게는 접근하기 힘든 외딴섬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평일에 40~50명, 주말에 70~80명 정도가 이곳을 찾는다. 하의도 후광리의 김 전 대통령 생가를 관리하는 현이민(63)씨는 “벼르고 별러서 오시는 분들이 많다. 꾸준히 찾아주신다”고 말했다.

■ 나고 자란 전남 신안 하의도 생가

하의도 생가 방문자가 늘어난 것은 천사대교 개통 덕분이다. 과거엔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지만, 지난 4월 천사대교(10㎞)가 개통된 뒤 지금은 안좌도까지 승용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목포항에서 안좌도까지 차로 30~40분, 안좌도에서 하의도까지는 배로 1시간으로 이전보다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김경민(61) 신안군 내고장 알림이는 “안좌도까지 차를 타고 와서 김환기 화백 생가를 둘러본 뒤, 안좌 복호항에서 하의도행 배를 타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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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인동초를 닮은 섬이다.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농민들은 비어 있던 섬을 개간해 땅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인조가 선조의 첫째 딸 정명 공주에게 하의3도(하의도·상태도·하태도)의 세곡을 4대까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하사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소유권 탈환’ 투쟁이 시작됐다. 1956년 평당 200원에 주민들에게 유상 분배되면서 300여년간의 싸움은 끝이 났다.

하의면 대리엔 피와 눈물로 얼룩진 농민들의 항쟁사를 조명한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된 2009년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하의3도 사람들이 불의에 맞선 정신이 나에게도 흐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4월18일 김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방명록에 ‘그립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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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와 신안군은 2000년 12월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뒤 인권과 평화의 섬으로 바꾸고 있다. 최근 울타리와 지붕이 없는 천사상미술관이 개관해 천사 조각작품 300여 점을 전시해 눈길을 모은다. 하의도 인근 무인도인 죽도(대섬)는 사람의 얼굴을 닮아 ‘얼굴바위’로 불린다. 일주도로 풍광과 죽도 일몰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전남도는 김 전 대통령 서거 10돌을 맞아 후광리 인근 등지에 한·중·일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심어 평화의 숲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 ‘정치적 고향’ 목포의 김대중기념관

하의도가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면, 그의 ‘정치적 고향’으로 꼽히는 곳은 목포다. ‘섬 소년’은 하의도를 떠나 목포에서 유학했다. 이곳엔 김 전 대통령의 기억·기념공간이 마련돼 있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그를 기념해 삼학도에 만든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다. 2013년 6월15일 개관일은 최초 남북정상회담 개최일(2000년 6월15일)에 맞춘 것이다. 김석이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전시운영팀장은 “개관 이후 방문객 수는 지난달 말까지 120만여명으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방문객은 첫해 14만여명에서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학)는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등 자신을 탄압했던 전직 대통령과 화해했다. 대통령 재직 때보다 퇴임 이후에 긍정적인 평가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중기념관은 “현실 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안희정·안철수 등 정치인들이 김대중기념관을 방문하는 등 정치의 계절에 더 붐빈다. 정헌주 연세대 교수(행정학)는 ‘김대중기념관과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논문(2018)에서 “김대중기념관은 정치인들이 호남의 지지, 나아가 진보 진영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마땅히 거쳐야 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인 김대중, 인간 김대중에 대해 사유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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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과 김대중도서관

김 전 대통령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은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현장’이다. 1961년 5월14일 재보궐선거에서 초선 민의원이 됐으나, 이틀 뒤 5·16 군사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은 이후부터 1995년 경기도 일산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그는 동교동에 살았다. 그는 동교동 자택에서 1971년 사제 폭탄 투척 사건과 1973년 일본에서의 피랍 사건, 1970~80년대 민주화 투쟁과 투옥, 사형 선고, 가택연금 등 고통과 인내의 세월을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재건축된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와 2009년 눈을 감았다. 김 전 대통령을 따르던 정치인들을 지금까지도 ‘동교동계’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 바로 옆에 마련한 ‘김대중도서관’은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 도서관이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뒤 도서관 5층 사무실에서 지인들을 만났다. 1978년 8월31일 서울대병원 병실에 ‘투옥’된 그가 군부 독재정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과자 봉지에 못으로 눌러써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한 편지 36통과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입고 있던 수의 등이 전시돼 있다. 5층 규모의 도서관에는 전시관뿐만 아니라 사료관, 회의장, 연세대 북한연구원 등도 마련돼 있다. 하루 15~20명, 한 해 6천~7천명이 이 도서관을 찾는다. 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10돌을 앞두고는 방문객이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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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서관은 역설적이게도 김 전 대통령을 감시하기 위한 군부독재 정권의 ‘감시 초소’ 자리에 들어섰다.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군부독재 시절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바로 옆에는 정보기관과 경찰 ‘요원’들이 그와 이희호 여사, 방문객들을 감시하는 주택 5채가 있었다”고 이 터를 설명했다.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는 동교동 자택은 지난 6월 이희호 여사까지 세상을 떠나 이제 빈집으로 남아 있다. 이 여사는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기념관’으로 사용하고, 김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 상금은 기념사업 기금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은 “서울시에 기념관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직 구체적인 부분까지 협의가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정대하 채윤태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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