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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구미호에 여의주, 한국적 SF로 세계적 주목 받는 이윤하 "다음 작품은 일제 식민지배를 그린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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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계 미국인 SF 작가 이윤하를 지난 17일 월드콘이 열리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 컨벤션센터에서 만났다. 이윤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블린/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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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더블린 세계SF대회(월드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작가 가운데 하나는 이윤하다. 한국계 미국인 SF작가 이윤하는 <제국의 기계(Machineries of Empire)> 3부작으로 ‘SF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 최종 후보에 3년 연속 올랐다. 2017년 휴고상 장편 후보에 오른 1부 <나인폭스 갬빗>(허블)은 최근 한국에 출간됐으며, 올해엔 3부 <레버넌트 건>이 장편 후보, <제국의 기계> 3부작은 최고 시리즈상 후보에 각각 올랐다.

18일 발표된 휴고상은 아쉽게도 기후재앙과 여성 우주인의 이야기를 다룬 <The Calculating Stars>을 쓴 메리 로비넷 코왈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시상식 이전에 벌어진 휴고상 장편부문 최종후보작에 대한 토론에서 이윤하는 “단단하고 잘 만들어진 작품” “열정적인 팬들이 많다” “아이디어가 새롭다”는 호평을 들었다.

이윤하가 쓴 스페이스 오페라(우주를 무대로 전투 등 모험이 벌어지는 이야기)엔 김치로 보이는 ‘양배추 절임’을 괴벽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는 여성 장교가 전투에서 ‘고승의 부채’ 전형을 짜고 ‘구미호 장군’이 등장한다. 휴고상의 주류는 백인 남성 작가의 작품이었다. 2015년 중국 류츠신의 <삼체>가 휴고상을 수상하며 아시아 SF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이윤하는 한국 문화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목받고 있다. 지난 17일 월드콘이 열리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컨벤션센터에서 만난 이윤하는 “우주선에서 사람들이 스테이크와 감자만 먹는데 미국 음식이 다는 아니다. 김치를 우주선에서 보고 싶었다”며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 쓰면서 ‘아프로 퓨처리즘’(아프리카의 전통 문화와 SF·판타지를 접목시킨 것)처럼 문화 다양성에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월드콘에서 만나서 반갑다. 세 번째로 휴고상 후보에 오른 소감은.

“월드콘은 처음이다.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깜짝 놀랐다. 압도적인 경험이다. SF계에서 휴고상은 대단하다. 1970년대 휴고상을 받은 작품들을 고등학생 시절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런 위치에 서게 된 것이 정말 영광이다.”

-한국 전설에 나오는 구미호와 SF를 접목한 점이 흥미로웠다. 구미호를 차용한 이유는.

“사실 여우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한다.(웃음) 어린 시절 구미호에 대해 읽었다. 하지만 내 이야기에 간을 빼먹거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는 없다. 여우가 속임수를 쓰고 변신을 할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서양에선 여우가 속임수를 쓰는 캐릭터니까 서양독자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주인공 켈 체리스는 제국에 동화되고 싶어하면서도 어머니쪽 민족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등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캐릭터에 반영됐나.

“물론이다. 어린 시절 한국 사촌들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과 달리 나는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두 정체성으로 살긴 어렵기 때문에 어린시절엔 한국인의 정체성을 거부하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야 한국인이 내 정체성의 일부이며 유산이란 걸 깨달았다. 한국 문화와 역사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코넬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인폭스 갬블>엔 수학적 계산에 따른 역법이 무기로 쓰인다.

“수학에서 증명하려는 것을 전제로 세운 뒤 논쟁을 거쳐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야기를 만드는 구조와 닮았다. 하지만 아주 어려운 수학 공식을 이용한 적은 없다. 프랙탈 구조(작은 부분이 전체와 같은 도형) 같은 것을 이용한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수학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엄마가 어렸을 때 수학을 직접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또 다른 지식을 이용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게 있나.

“고대 중국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단편으로 쓰기도 했다. 취미로 작곡을 하기도 했는데, 음악의 구조 역시 소설쓰기와 닮았다. 지금은 미술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국을 다루는 판타지다. 그림과 안료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이 고대의 예술과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설정이다. 일종의 문화 말살이다. 서양미술사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다가 한국 전통 미술에 관한 이야기로 바꿨다. 한국 전통 미술에 대한 책을 찾을 수 없어 엄마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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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요소를 많이 쓰는 이유는.

“처음엔 나도 백인이 등장하는 SF를 썼다. 문화유산과 문화 유용(cultural appropiration·주류문화권에서 비주류 문화에 대해서 특정 인종만 특정 문화를 해야한다고 여기는 인종차별적 개념)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 역사와 신화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인폭스 갬빗>을 비롯해 제국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썼다.

“대학 때 임진왜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한국이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낸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인으로서 말하자면, 미국 또한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다. 현재 국제정치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여성 전사들이 많이 등장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광속으로 우주를 여행하기도 하는 미래엔 모든 젠더가 평등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린 시절, 중요한 일은 남성들이 다 하는 작품들을 읽었는데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열다섯 살 딸이 있는데, 여성들이 사회 전 분야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SF소설을 읽어봤나.

“영어로 번역된 한국 SF 단편선인 <레디메이드 보디사트바>를 읽었다. 복거일의 소설이 인상깊었는데, 북한 캐릭터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게임 등에서 북한이 악하게만 그려지는데, 체제는 나쁠 수 있지만 북한에도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SF의 매력은 무엇인가.

“어릴 때 읽은 책은 서양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이질적인(alienating)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SF엔 문자 그대로 외계인(alien)이 나온다. 새로운 세계는 나를 환영해주는 것 같았다.”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청소년을 위한 SF <드래곤펄>(용과 여의주가 등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로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을 쓸 때 ‘아무도 한국 설화에 기반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역사와 신화는 알려지길 기다리고 있다. 한국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더 많이 공유되면 좋겠다.”

이윤하의 딸은 최근 한글 공부에 빠졌다. 쿠바계 미국인 친구가 스페인어를 하는 걸 보고 자신도 한국어를 공부하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어린시절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한 이윤하는 한국어는 서툴지만 ‘진달래’ ‘은행나무’를 또렷히 발음하면서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 반갑다고 했다. 한국에서 추운 겨울에 먹은 냉면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디아스포라로서 ‘뿌리’를 찾기 위한 이윤하의 노력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코리안 퓨처리즘’의 첨단에 이윤하가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블린|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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