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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세상읽기]차별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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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의 일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족과 함께 집 근처 나들이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인천 계양산 자락에 예쁜 정원이 갖춰진 카페가 있었다. 열 살 난 딸과 아내랑 함께 바람이나 쐴 겸 향했다. 카페는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갑자기 딸이 “아빠! 여긴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야. 여기 ‘노키즈존’이라 13세 미만 어린이는 들어갈 수 없대”라고 한다. 검색할 때는 몰랐는데,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입구에 정말 그런 푯말이 서 있었다.

경향신문

부랴부랴 다른 곳을 찾아갔다. 아이에게 코코아 한 잔을 사주며 차별당하고 거절당한 기분에 대해 물어봤다.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기분이 어때?”라고 묻자, 아이는 “아빠, 엄마랑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 때문에 못 가서 미안해”라고 한다. 혹시 ‘여자’라서 차별당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한국 사람이어서 또는 피부색이 달라서 차별당한다면 어떨까?” 하고 물었더니 정말 불쾌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고 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며 평등권을 기본적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건 없는 평등이 민주주의와 근대 인권의 핵심 개념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실정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된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어느새 12년이나 경과했지만, 지금까지 이 법이 제정되지 못한 까닭은 ‘성적 지향’을 문제 삼은 일부 보수개신교와 출신국가와 성별 등으로 노동조건을 차별하는 재계의 반대, 그리고 이에 동조하거나 눈치를 보아 온 정부와 국회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차별과 혐오 정서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우리는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국가이지만, 지난해 제주 난민 사태가 보여주듯 난민 혐오 정서가 강한 사회이다. 3·1운동 100주년이라지만, 과거 우리도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을 떠돌던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실시하기로 한 보편적 인권교육에 대해 일부 세력이 ‘기독교정신에 반하는 인권교육’이라거나, ‘강제적 인권교육으로 학생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한다며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12년 “각종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참여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그러나 2017년 대선 때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이 존재하므로 불필요하다’며 공약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했다. 이후 유엔에서 수차례에 걸쳐 우리 정부에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함께 잘사는 나라’,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우리에게 차별금지법과 ILO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한 이유는 작게는 공동체 내부의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차별과 혐오가 죄라는 사실을 널리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더 넓게 보면 조건 없는 환대(hospitality)라는 인류 보편의 정의를 위한 것이다. 환대는 공동체 안에 이미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자에 대한 환대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함께 잘사는 나라’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마음을 울리는 경축사와 선언을 들려주었고, 시민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땅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위한 정부와 대통령의 의미 있는 실천이 보고 싶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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