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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워싱턴 DC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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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날리는 옛 주미공사관에서 光復의 의미를 묻다

우뚝 선 워싱턴기념비 아래서 우리 분열의 역사를 보네

치욕도 영광도 모두 우리 것, 서로에 손 내밀 수 없을까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물가는 높고 연봉 1000원으로는 태반이 부족하여 조석반은 관내에서 지어먹는다.…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 공사(公使)가 허구한 날 트집을 잡는 것이다.…대저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국으로 부강한 나라들이고, 오직 조선만 빈약하다. 그러나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 한다.'

―월남 이상재 '미국서간' 중에서



바람은 고요하고, 햇살은 눈부셨다. 절정에 오른 대국(大國)의 여름은, 이 나라 대통령의 요란한 트위터와는 딴판으로 평화로웠다. 호텔에 짐을 부리고 길을 나섰다. '죽기 전 워싱턴에 가면 꼭 봐야 한다'던 너의 호들갑을 믿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걸어 20분. 로건 서클로 접어드니 멀리 주황색 건물 위로 낯익은 깃발이 펄럭였다. 태극기였다.

빅토리아 양식의 3층 건물은 작은 왕관을 쓴 듯 우아했다. 구한말 청·일 간섭에서 벗어나려 왕실 예산의 절반으로 마련했다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다. 육중한 나무 문을 젖히니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1888년 겨울, 서울을 떠나 3만9000리를 건너온 조선의 외교관들은 영어와 물정에 모두 서툴렀으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으려 분투했을 것이다. 그 흔적이 남았다. 태극 문양 쿠션과 병풍으로 꾸민 접견실, 빠듯한 살림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식당, 미 동부의 혹한을 달래주었을 라디에이터….

초대 공사 박정양의 기개가 가슴을 울렸다. 가슴 파인 옷차림의 미국 여인들을 보고 "기생들이냐?" 물었다는 이 고지식한 선비는,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청나라 지시를 무시하고 독자 외교를 펼치다 부임 10개월 만에 본국으로 소환됐다. 고종이 2대 공사로 미국인 의사 앨런을 임명하려 하자 상소를 올렸다. "조선인이 있는데 외국인으로 대신하는 것은 매우 구차하여 비웃음을 살 염려가 있나이다."

굴욕의 을사늑약으로 공사관은 16년 만에 폐쇄됐다. 미국이 조선 편에 서주리란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 힘없는 나라의 목소리에 세계는 귀 기울이지 않음을 깨달았을 땐 단돈 5달러에 공사관을 빼앗긴 뒤였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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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가로수가 도심의 열기를 식혔다. 워싱턴은 프랑스 건축가 랑팡이 골격을 설계한 계획도시다. 가장 높은 곳에 국회의사당을, 그다음 백악관을 앉혔다. 그러나 도시의 중심은 사위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워싱턴 기념비'다. 박정양은 자신의 문집 '미행일기(美行日記)'에 썼다. "높이가 550척, 너비가 55척이며 대리석으로 담장을 마련하였는데 돌문과 8개 창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이는 한 나라 인민이 그 독립의 공업을 잊지 않고 이를 새겨 놓은 것이다."

이 통합의 상징을 우러른 이는 또 있었다. 훗날 고종의 밀사로 주미공사관에 파견됐으나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미 정계를 뛰어다니며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한 청년 이승만이다. 낡은 사조에 갇혀 세계의 격변을 읽지 못한 채 수구네 반역이네 분열만 일삼다 망국의 길로 들어선 조선의 운명 앞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집트 오벨리스크 형상의 새하얀 기념비를 바라보다 유월절을 떠올렸다. 유대인이 이집트(애급)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이날, 이스라엘 국민은 누룩이 없는 빵과 쓴 나물만 먹는다고 했다. 애급의 노예로 살았던 쓰디쓴 고통을 곱씹으며 다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다. 거기, 우리의 광복절이 겹쳤다. "임정 요인 한 사람에 당이 하나씩이더라"는 독립운동가 장준하의 탄식처럼 분열과 혐오의 역사를 거듭해온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둘로 쪼개져 색출, 응징, 청산을 외쳤다. 이날만큼은 대한민국, 그 고단한 역사를 일궈낸 모든 이의 피·땀·눈물에 경의를 표할 순 없을까. 이날 하루만큼은 선동과 삿대질을 멈추고 치욕도 영광도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며 따뜻하게 안아줄 순 없을까. 소가 웃을 일인가.



링컨기념관을 향해 걷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보았다. 야전군인 듯 철모에 망토를 입고 전진하는 군인들 조각상 앞에 붉은 장미꽃이 놓였다. 이름 모를 나라에서 그들이 젊음을 불살라 지키려 했던 자유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목젖이 뜨거워졌다.

비가 쏟아졌다. 어린애 주먹만 한 우박도 떨어졌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 긴 여행을 다녀오라던 너의 충고를 떠올렸다. 용서해야만 과거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용서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였다. 멀리 포토맥 강변으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쌍무지개다. 반가운 소식 오려나. 이제 그만 내려놓으려 한다.

[김윤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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