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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⑨]양승태 키즈 업무수첩 “인권법연구회, 어느 시기에 손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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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을 제어하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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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처 아닌 양형위 이규진 판사

2015년 작성, 행정처와 e메일


“말씀해주신 대로 적절히 접하였습니다. 부장님께서 아시듯이 CJ가 등장하는 것은 모두 사소하지 않으니까요.” 2015년 4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 박상언 판사는 전임 심의관 이호재 판사의 e메일에 이렇게 답변했다. CJ는 ‘Chief Justice’,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뜻한다. 이 판사는 “사소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사법지원실에서 대법원장님께 확인해보라고 했다고 해서 기조실이 알고 계셔야 될 것 같아서 알려드립니다. 기조실은 뭐든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심의관들과 공유하세요”라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양 전 대법원장 중심으로 돌아간 사정을 보여주는 증거다.

“법관을 제어하라.”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혐의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사법정책실·윤리감사관실·인사총괄심의관실 등 여러 부서가 총동원됐다. 법원행정처 소속이 아닌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법원행정처 내부 회의에 직접 참석해 일을 주도했다. 법원행정처와 관계없는 국제기구 파견 판사도 ‘브레인’ 역할을 했다. 이들이 예산 지원 중단이나 해외출장 지원 같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들을 길들이려는 ‘채찍과 당근’ 방안을 내놓았다. 이들은 왜 이렇게 분주히 움직였을까. 법정에서 공개된 증거엔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탄압을 지휘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채찍과 당근 전술 필요”

박상언 판사는 지난 16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당초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다. 인사모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소모임으로 법관 인사 등 사법제도를 연구했다. 박 판사는 “인사모 활동하는 분 중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분이 없다” “제가 회원이 아니라서 인사모 내부 이야기를 알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 박 판사가 어떻게 인사모 대응방안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작성 문건이 토대였다. 박 판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으로부터 이 문건을 받았다. 양형위원회는 법원행정처와 별개의 조직이다. 그런데 이 전 상임위원은 마치 법원행정처 소속처럼 움직였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 규모를 축소하려고 판사들의 연구회 중복 가입을 금지할 때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했다.

이 전 상임위원이 2015년 8월19일 임 전 차장 등에게 보낸 ‘인권법 관련’이라는 제목의 e메일이 법정에서 공개됐다. e메일엔 “지난 월요일 (박병대) 처장님께서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구회 내 소모임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하면서 차장, 실장들과 그 방향에 관하여 논의해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150819) 인사모 관련 [실장회의용].hwp’ ‘(150721) 사법제도 소모임 보고(이규진).hwp’ 파일이 첨부됐다.

e메일 발송 이틀 전인 2015년 8월17일 기록된 이 전 상임위원의 업무수첩에는 “사법제도 소모임-바깥? (실장회의에서 논의), 어느 시기에 손볼 것인가?→금주 내로, 국제인권법연구회 존폐론”이라고 적혔다. 인사모에 대한 박 전 처장의 우려에 따라 법원행정처가 논의한 대응방안이 담겼다. 업무수첩의 같은 달 24일자에도 구체적 방안이 나온다. “실장회의-인사모 토론, 처장님-인사모 보고, 처장-재검토 要(요)” “(소모임) 회장이 나선다, 회원들 의사 존중, 예규에 反(반), 연구회 성과 평가위원회에 의뢰, 예산지원 전산지원, 커뮤니티 내 활동 불가, 연구회 밖 음성화, 당근-인권 관련 외국 출장 기회, 코트넷 인권 자료실”이라는 문구가 기재됐다.

임 전 차장이 박 판사에게 참고하라며 전해준 문건은 또 있다. 검찰 수사 결과 이 문건은 백강진 판사가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백 판사는 2015년 크메르루주 유엔특별재판소 재판관이었다. 해외 파견 판사가 손수 인사모 대응방안을 검토한 것이다. 백 판사는 임 전 차장과 2005~2007년 법원행정처에서 함께 근무했다.

백 판사가 작성한 문건엔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은 모임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회원들 의사는 존중하되 예규의 해석상 다소 의문이 있으니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등에 (공식/비공식) 조회를 해보자는 의견 제시”라는 내용이 나온다. “음성적 모임을 계속해나가는 경우 법관윤리강령 위반 여부 등에 따라 처리→법원 내외부에서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고, 영향력 또한 크지 않을 것임” “예산 등 지원 중단”이라고도 적혀있다.

백강진 판사 “채찍과 당근” 문건

임종헌이 행정처 심의관에 전달


“채찍과 당근 전술을 구사할 필요”라는 대목에는 “국제인권법 회원들의 열정을 이 기회에 잘 알게 되었으니 관련 기관 해외출장(각종 인권 관련 기구), 연구용역 등 추가 기회 부여하거나 원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커뮤니티 예산이 아닌 특별예산 지원 검토, 코트넷에 국제인권 자료실, 토론바 등 코너 개설 검토, 해당 모임 추진자들과 식사 면담 등을 통해 신의를 확인”이라고 쓰여 있다.

■ “대법원장님께 잘 보고됐습니다”

“처장님·대법원장님께 잘 보고”

심의관 e메일엔 여러 차례 등장


“세 분의 도움으로 첨부와 같은 보고서가 처장님과 대법원장님께 잘 보고됐습니다.” 2015년 7월29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 시진국 판사가 김민수 판사 등에게 보낸 e메일에는 이렇게 나온다. e메일에는 ‘상고법원 입법 관련 BH(청와대) 설득방안’ 문건이 첨부됐다.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에 협력해온 판결을 적시해 재판 거래 의혹을 받은 대표적인 문건이다. 김 판사는 “임 전 차장이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저를 포함한 다른 심의관들도 그런 전제하에 업무를 했다”고 증언했다.

심의관들이 주고받은 e메일에는 ‘대법원장’이 여러 번 등장한다. 2016년 4월8일 박상언 판사가 다른 심의관들에게 보낸 e메일에는 “심의관들의 전적인 도움으로 지난번에 보내드린 것과 같이 전문분야 연구회 관련 전반적 보고를 마쳤고, 차장님께서 잘되었다며 대법원장님과 처장님께 이미 보고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대법원장님 보고를 마친 서류를 지금 실장회의에 올리셨다는 것은 아마도 회의 후에 결정된 구체적인 방안을 실행에 옮기라는 지시가 있을 듯하네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박 판사의 또 다른 e메일에는 “별 내용 없지만 또한 크게 중요한 아이템 같지도 않지만 차장님께서는 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하여 (CJ 직보 아이템이기 때문이겠죠...) 보고서를 첨부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박 판사는 법정에서 “후속조치 지시를 받는 과정에서 임 전 차장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박 판사는 이 전 상임위원으로부터 2017년 1월 양 전 대법원장이 후임 대법원장에게 부담을 주면 안되니 지금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조치를 취하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 사법 신뢰 지키려고 했다?

양 “법원 신뢰 위해” 주장했지만

문건엔 “대법 정책 반대해 문제”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은 일련의 행위들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는 5일 김민수 판사에게 “법관윤리강령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는 사적 조직이 있는데 이를 방관할 경우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법원행정처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검토하는 것은 사법행정의 권한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박 전 처장 측은 법관 커뮤니티인 ‘이판사판 야단법석’ 와해 시도 혐의를 두고도 “게시글이 국민에게 알려지면 사회적 비판을 받거나 사법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대법원 정책에 반대해 문제”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특정 분야 연구회가 인권의 보편성을 비롯한 광범위한 활동 범위 및 인적 네트워크를 내세워 법관 사회 이슈를 독점하는 현상 방지할 필요” “자연스러운 소멸 유도” 같은 노골적인 내용도 있다. 김 판사는 “인사모가 상고법원과 관련해서 끝장토론을 한다고 하니까 위에서 걱정하시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2016년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작성한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 문건에는 “핵심 회원에 불이익 부과”라는 문장도 나온다. 박상언 판사는 이 문건을 참고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불이익 부분은 마음이 좀 그래서 뺐다”고 했다.

사법부 신뢰를 떨어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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