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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성폭행 피해자’→‘살인자’ 몰렸던 여성 법원서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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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원천적 금지된 엘살바도르에서

성폭행범 아기 사산했다가 징역 30년

“고의성 증거 없다” 재심서 무죄 판결

‘낙태금지법’ 개정으로 이어질지 관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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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으로 임신한 아이를 일부러 살해했다는 혐의로 30년형을 받았던 엘살바도르 여성이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낙태’에 살인죄까지 적용하며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보수적 가톨릭 국가 엘살바도르가 이번 판례를 계기로 낙태금지법 개혁에 나설지 관심이 집중된다.

엘살바도르 코후테케페 법원은 19일 “에벨린 에르난데스(21)가 고의로 아이를 살해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로 석방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33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과 파기환송심까지 거친 재판의 최종 결과다. 에르난데스는 선고 직후 법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하느님께 감사한다. 정의는 이뤄졌다”며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르난데스는 2015년 갱단 조직원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다. 18살 대학생 때다. 이듬해 4월6일, 그는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심한 복통과 출혈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진료 도중 그에게서 출산 흔적을 발견한 의사가 경찰에 신고했다. 그의 집 화장실 정화조에선 사산된 아기 주검이 발견됐다. 에르난데스는 “성폭행 이후 충격을 받아 임신 상태인지 전혀 몰랐다”며 “(출산 당시에도) 아이 우는 소리조차 듣지 못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병원에 온지 사흘 만에 체포됐다.

검찰은 단순 낙태죄를 넘어 가중 살인죄 혐의를 적용해 에르난데스를 기소했다. 임신한 줄도 몰랐다는 에르난데스의 주장과는 달리, 임신 사실을 숨기고 아기를 고의로 죽였다고 본 것이다. 2017년 7월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에르난데스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에르난데스 쪽에선 아기가 태변 흡입에 따른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부검 결과를 근거로 상고했다.

대법원은 지난 2월 그가 고의로 태아를 해치려 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원심을 파기했고, 에르난데스는 이 판결로 33개월 만에 석방됐다. 검찰은 살인 혐의를 고수하며 사실상 ‘괘씸죄’까지 더해 기존보다 10년을 더한 40년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결국 에르난데스의 손을 들어줬다. 국제 앰네스티는 이날 판결에 대해 “엘살바도르 여성 권리의 완전한 승리”라고 평가하며 엘살바도르 정부를 향해 “여성을 죄인으로 만드는 부끄럽고 차별적인 관행을 끝낼 때”라고 촉구했다.

국민 60%가 가톨릭 신자인 엘살바도르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로부터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엄격한 낙태금지법을 두고 있다. 성폭행과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뿐 아니라 산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경우에도 낙태를 금지하고, 유죄로 인정될 경우 2년 이상 8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심지어 에르난데스의 사례처럼, 아이를 낳다 사산하거나 임신 중 의료 응급상황으로 유산하는 경우에도 살인이나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최소 징역 30년 이상의 살인죄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2000∼2014년 사산이나 유산을 경험한 후 처벌받은 여성의 수는 147명이며, 시민단체들은 현재 최소 17명이 복역중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서도 최근 들어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취임한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경우엔 낙태가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이번 판결로 엘살바도르의 낙태 금지법 개정 여론이 탄력을 받게 될지 주목된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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