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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인터뷰]“관객이 여백 채우는 영화 만들고 싶다”…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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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보라 감독은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로, 꿀을 채취하거나 할 때 착지하지 않는다”며 “작은 생명체가 분주하게 자기 삶의 본질을 찾아다니는 은희와 닮아 제목을 ‘벌새’로 정했다. 사실 우리 모두 벌새처럼 사는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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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만과 불안을 가지고 산다. 불만과 불안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극이다. 더 불행한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을 겪고 나면 현재 갖고 있는 불만은 만족 또는 안도로 바뀐다. 어찌보면 인생은 불만과 불안의 연속이지만, 가장 크게 와닿는 시기는 청소년기가 아닐까 싶다. 몸도, 마음도 급변하는 데다 치열한 입시 경쟁까지.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이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살았던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가 겪는 불만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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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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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파트 복도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은희의 뒷모습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엄마”라고 소리쳐도 답이 없다. 스릴러 못지 않은 긴장감을 유발하지만, 알고 보면 층을 헷갈려 집을 잘못 찾아간 것이었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보라 감독(38)은 “아파트에서 그런 일 종종 일어나지 않느냐. 저도 겪었던 일이다. 이 영화가 ‘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제가 말한 ‘집’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닌 심리적인 집”이라며 “전체적인 영화 톤과 다르다는 얘기가 있어 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이같은 낯선 형태의 시작이 전체 영화의 톤을 잡아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94년 중학교 1학년이던 김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은희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는 “흔히 ‘중2병’이라고 그 나이를 희화화하는데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몸도 자기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라고, 경제적으로 의탁해야 하고 미래를 모르는 상황이면 불안한 건 당연하다. 과연 중2병으로 희화화할 수 있나 싶다. 항상 약자가 희화화된다. 그때 어리다는 이유로 가볍게 치부되고,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의 마음은 어른이 돼서도 남는다고 본다. 그때 그 원형적 감정을 잘 돌봐주면 훨씬 건강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벌새>를 통해 그 때 못 만났던 시절을 만나길 바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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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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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이 배경인 만큼 트램펄린·삐삐·카세트테이프·베네통 배낭 등 당시를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장소·소품들이 등장한다. 김 감독은 “은희가 메는 베네통 가방은 시나리오 쓸 때부터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당시 모두가 갖고 싶어한 ‘히트 아이템’으로 저도 메고 다녔다. (웃음) 중고 사이트에서 어렵게 구했는데, 영화에 너무 전면으로 드러나 베네통 본사에 연락해서 상표권 허락도 받았다”고 말했다.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 역시 감독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장면이다. 그는 “학창시절 학원을 많이 다니진 않았는데, 은희처럼 한문학원을 다녔다. 원생도 별로 없는 허름한 보습학원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은희를 가장 인격체로 대해주는 이는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로, 우롱차를 내주며 은희와 이야기한다. 김 감독은 “실제 영지의 모델이 되는 선생님이 계셨다. 보이시하면서도 시크한 분이었다. 우롱차를 대접해주시기도 했다. 그분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은희처럼) 저도 꿈이 만화가였다. 만화를 잘 그리지 못하지만, 지금도 좋아하고 위로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영지가 부르는 노래는 1990년대 노동가요 ‘잘린 손가락’이다. 김 감독은 “운동했던 분들이 영화를 보고 반가웠다는 글도 많이 봤다. ‘전화카드 한 장’이랑 ‘잘린 손가락’ 중 뭘로 할까 고민했는데, ‘잘린 손가락’ 가사가 더 애수가 있어 영화에 어울릴 것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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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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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는 김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돼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상에 해당하는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이후 베를린·트라이베카·이스탄불·베이징 등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배우·촬영상 등을 포함하면 받은 상이 25개에 달한다. 김 감독은 “수상은 작은 영화를 알릴 계기가 되니까 당연히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오늘은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계속 받으니 얼떨떨한 게 약간의 정신적 충격도 받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최근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유학파다. 동국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200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다 2013년 <벌새> 초고를 썼다. 그리고 2017년 강단에서 물러나 <벌새>를 준비했다. 그는 “다른 지형에서 공부한 게 다른 목소리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외국에 있다 보면 자신의 나라를 조금 더 타자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점이 좋은 것 같다.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과거 기억도 건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인종이나 언어는 다르지만, 원하는 건 다 같다는 점도 알게 됐다. 그런 생각을 <벌새>에 많이 녹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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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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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1947~2007)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앨리슨 벡델의 <펀 홈(Fun Home)>을 좋아한다”며 “작가의 개인적 서사에서 시작한 만화인데, 사려 깊은 세계관을 담고 있는 굉장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만화”라고 말했다.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지도 물었다. 그는 “(제)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2011)을 본 우드스탁영화제 심사위원이 이런 평을 했다. ‘영화를 본 뒤 너무 먹먹해서 하염없이 걸었다’. 그 평이 참 와닿았다. 관객을 압도하는 거장의 위압감을 느껴지는 영화보다 관객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속의 것과 만나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 주장만 빼곡한 영화가 아니라 공간, 여유, 여백이 있어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로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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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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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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