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1]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김규나 소설가


물고기가 상어에게 공격당했을 때, 노인은 마치 자신이 공격당한 느낌이었다.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ㅡ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시련과 맞서 싸우는 인간을 그린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최고 작품이다.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산티아고는 다시 바다로 나간다. 마침내 대어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길,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만 끝내 빈손으로 귀환한다.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작품으로 일찍부터 명성을 떨친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발표하고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잇달아 받는다. 그러나 너무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하고 어둠 속으로 한 영혼을 밀어 넣기도 하는 법. 그는 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할 거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을 앓는다. "나는 작가다. 작가가 글을 쓰지 못하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며 비관하던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조선일보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라며 산티아고가 굴복하지 않았던 건 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소년, 마놀린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 모든 경험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수많은 연애와 결혼 네 번, 작가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예를 누렸지만 헤밍웨이는 계속 살아가게 할 단 하나의 희망, '마놀린'만은 갖지 못했던 것일까.

누구의 삶도 완전하지 않다. 작가의 모자람이 작품을 쓰게 하고 작가 자신을 파괴하기도 하듯, 밑 빠진 항아리 같은 인생일지라도 가득 채워질 날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인간은 무너질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하나를 주면 더 큰 것을 빼앗아가는 고약한 우주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을지라도.

[김규나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