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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수)

“선생님, 추워요” 신파 섞인 유언 얼어붙은 1970년대의 ‘구조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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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49)별들의 고향

감독 이장호(1974년)



한겨레

<별들의 고향>은 한국영화에 1945년 해방둥이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신 미국 기지촌 문화를 배웠으며, ‘엔카’(演歌) 대신 ‘팝송’을 불렀고, 고등학생으로서 4월19일 그해의 봄과, 그 이듬해 광화문에 탱크가 입성하는 5월16일을 지켜보았으며,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낸 경제적 근대화의 첫 수혜자가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는 슬픈 것일까. 그저 떠밀리듯 여기에 와버렸고, 표류하듯 두리번거리면서 떠돌고 있으며, 미래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박정희는 1974년 그해가 시작하자마자 긴급조치 1호, 2호, 3호, 4호를 연달아 선언했다. 그들은 서른살 어른이 되었을 때 그걸 그저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세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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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와 동갑인 해방둥이 소설가 최인호는 서른살을 앞두고 <별들의 고향>을 신문에 연재했다. 모두들 이 소설이 장안의 지가를 높였다고 말했다. 경아라는 여자. 그녀는 네명의 사내를 만나면서 차례로 부서져간다. 감상적이고 슬픈 문장들. 반짝거리면서 희미해져가는 운명. 이장호는 여기에 어떤 개념을 부여하거나 상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별들의 고향>은 베껴 쓰듯이 찍은 영화다. 이장호는 그저 그 이야기를 느껴보는 대로 찍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별들의 고향>은 감정으로 가득 찬 영화다. 그런데 그 감정이 마치 시대정신처럼 우울한 멜랑콜리가 되어 경아를, 경아의 몸을, 경아의 대사를 갉아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고작 신파에 지나지 않은 이 영화의 줄거리가 이 세상에 실현된 저승처럼 비애의 알레고리가 되었다. 경아는 눈 쌓인 강가에서 죽어간다. 그러면서 속삭이듯이 말한다. “선생님, 추워요.” 그냥 들으면 간지러운 이 한마디가 1974년에는 희망 없는 구조를 요청하는 가련하고 결사적인 유언이 되었다. 경아는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이듬해 유신헌법이 재차 국민투표에 부쳐져 통과됐다.

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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