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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기억속 흐릿한 사람들…반투명 이미지로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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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물수제비`(130×97㎝). [사진제공 = 통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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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몸에 물결이 통과한다. 그 형체가 곧 풍경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흐릿하다.

서울 통인화랑 개인전 '다시 지금 여기에'에서 만난 김정선 작가(47)는 그림 '물수제비' 앞에서 "내 기억 속 사람들이어서 반투명 인간으로 그렸다. 흘러간 과거를 재소환했기에 곧 흩어질 것 같은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5년 아이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 사진을 화면에 옮겼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때 그 모습으로 현재에 실재하지 않기에 유령같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그렸다고.

서울 압구정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사진 속에서 그림 소재를 찾아왔다. 1990년대 이미지 소비 시대 속에서 성장해 사진이나 인터넷 이미지에서 그림 실마리를 발견한다.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지인들 카카오톡 프로필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사람들이 자기를 대신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것은 뭘까 궁금했다. 아이나 강아지, 맛있는 음식, 여행에서 찍은 뻔한 랜드마크 등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란 게 별것 없고 통속적이고 유치할 수 있지만 거기서 정체성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서울대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를 졸업한 그는 한때 이미지 작업으로 스승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다. 1995년 첫 개인전 때 선보인 잡지·광고·패션 이미지가 자극적이고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미지를 죄악시하던 시대였고, 압구정에서 성장한 게 콤플렉스였다. 불행이 점철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야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편견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지 소비 세대인 나로서는 사진 세계가 편했고 현실이었다. 아버지의 중학생 시절 사진을 보고 '인간은 늙고 병든다'는 순리에 슬펐다. 치열한 삶도 공허한 죽음도 모두 사진에 담겨 있다."

방황하던 그는 사진 이미지를 예술로 끌어올린 팝 아트 거장인 앤디 워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에게서 자신감을 얻었다. 사진 이미지로 조각을 만드는 후배 작가 권오상도 그의 작업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작가가 그린 배꼽티와 하이힐 이미지도 당당한 미술 작품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그렇다고 사진에만 천착하는 것은 아니다. 한강 변에 분홍 물결을 만든 핑크뮬리, 길바닥에 핀 민들레 등 사소해 보이는 자연도 그림 속에 들어왔다.

"가족의 투병 소식에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갈피를 못 잡았다. 작업실에 못 가고 한강을 돌아다녔는데 핑크뮬리가 눈에 들어왔다. 추상적이지만 현실이고 예뻤다. 그동안 안 써보던 색깔도 써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렸다. 사진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도 단숨에 그릴 수 있었다. 예전보다 작품을 덜 매만졌다."

그의 그림에는 작고 투명한 구슬이 보인다. 작가가 놓친 노스탤지어(향수)와 순수라고 한다. 전시는 25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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