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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후쿠시마 원전 피난민 모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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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유코(57)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난민이다. 그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교토에 산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가 몇년 간의 해외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3년반만에 일어났다. 후쿠시마 원전의 수소폭발은 2011년 3월12일에 일어났는데, 그 전날 대지진과 쓰나미로 가토의 집의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겼다. 다행히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원전이 폭발했다는 것은 3월13일 이후에야 알았다. ‘여기는 60km 정도 떨어진 곳이니까 괜찮겠지.’ 정부도 60km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겐 대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가토는 그때 후쿠시마 시청의 사무직 계약직원이었다.

가토의 일상은 그런대로 돌아갔다. 수도가 끊겨 2시간씩 대기해 급수차에서 물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물건이 동이 난 가게들을 전전하며 먹을 것을 구해야 했지만. TV에서 ‘외출을 자제하고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바로 벗거나 버리고, 샤워를 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가토는 ‘수도가 끊겼는데 어떻게 샤워를 하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방사능 구름’ 같은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방사성 물질이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점차 ‘괜찮을까’ 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가토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딸이 등교할 때 모자, 안경, 마스크, 장갑, 긴팔 옷, 타이즈까지 입혀 중무장을 시켰다. 그렇게 학교에 가는 건 딸 뿐이었다. 러시아 체르노빌 보고서까지 읽고 난 후, 가토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가토는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르면 ‘충분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피해 증명서’를 받을 수 없었다. “체르노빌 보고서를 읽고, 막연하게 300km 이상은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토는 주택 제공을 받을 수 있는 오사카로 가기로 했다. 살림살이를 모두 버렸다. 여름옷을 넣은 캐리어를 끌고, 9살 딸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 남기로 한 아버지·남동생 부부와는 헤어져야 했다. 몇달 동안 연습해 온 플루트 콩쿠르 출전을 앞둔 딸은 왜 우리만 가야 하느냐고, 친구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울며 버텼다. 사고가 난 지 한달 만이었다.

경향신문은 다른 후쿠시마 주민들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후쿠시마·한국 청소년 교류’ 차 한국을 찾은 가토 모녀를 지난 21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당시 9살이었던 딸 히로코(가명)는 이제 대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까지만 해도 환경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가토는 지금 일본정부와 전력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의 원고가 되어 탈원전 문제에 앞장서고 있다. 모녀가 도망치듯 떠난 지역에서, 내년엔 올림픽 경기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가토 모녀를 만나 거대한 재난과 사고 앞에 ‘국가’를 믿을 수 없었던 개인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가토 모녀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경향신문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의 피난민인 가토 유코(57) 모녀가 21일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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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가 고향인가요.

“후쿠시마 태생입니다. 원전에서 60여㎞ 떨어진, 후쿠시마현에서 살았습니다. 저와 딸은 2000년부터 7년간 독일에서 살았어요. 2007년에 9월에 제 고향인 후쿠시마시로 딸과 이주해 원전 사고 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 피난은 어디로 간 건가요.

“사고 1달 후에 후쿠시마 시에서 오사카로 갔고, 또 한 달 후에 교토로 이사했습니다.”

- 사고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세요.

“대형 지진이 난 뒤 전기, 수도, 가스가 다 끊겼습니다. 급수차 앞에 줄을 서서 1시간반이나 2시간 동안 기다려 물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밖에 나와 가게를 전전했습니다. 지진 때문에 물품 보급이 안돼 가게에 물건들이 거의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고 후 방사선량이 올라가는 상황에서도 나는 물과 먹을거리를 사러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밤만 되면 설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어떻게 직접 방사능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나요.

“(처음에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60여㎞까지는 방사능의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방향으로 방사능 구름이 날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방사능이나 원전에 관한 정보와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독협회’에 ‘후쿠시마는 안전한가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후쿠시마 대학교 교수가 제게 원전 자료와 관련 인터넷 링크를 보내줬습니다. 그것을 다 읽었습니다. 피폭을 당해 병을 얻는데 ‘역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치가 없다면, 멀리까지 피난하는게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됐습니다.”

- 히로코는 사고 후에도 학교를 다녔나요.

“학교는 다녔습니다. 마스크, 모자, 안경, 장갑 등 최대한 피부가 안 보이도록 가린 뒤 교복 안에 타이즈도 신고 다녔습니다. 방사선 때문에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안내를 받은 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밖에 나가지 말고, 나가면 들어와서 옷을 버리거나, 벗고 바로 샤워를 하라’는 안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물이 안 나오고 외출을 안 할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60여㎞ 떨어진 곳인데도 그런 안내가 나왔나요.

“후쿠시마에 방송되는 주요 방송국에서 다 그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 정부의 지원이 있었나요.

“재해 발생 시 살 수 있는 공영주택에 들어가려면, ‘이재증명서’를 받아야 하는데 저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집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사카가 이재증명서가 없어도 받아준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신청서를 오사카에 내고, 후쿠시마에서 1주일 간 집을 정리하고, 가재도구를 다 버렸습니다. 여름 옷, 딸의 학교 가방과 최소 필요한 학용품 정도만 챙겨 수트케이스에 넣어서 오사카로 이주했습니다.”

- 오사카 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이사간 곳에 다른 피난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부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둘만 있고 정보 교환을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립되었습니다. 집 제공 외에는 어떤 지원도 없었습니다. 날마다 ‘정말 내가 피난을 잘 온 것인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습니다. 컨디션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버지, 남동생 가족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살았습니다. 제가 일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초등학생 딸을 돌봐줬습니다. 오사카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큰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슬픔이 컸습니다.”

- 가족들은 왜 함께 피난가지 않았나요.

“아버지는 후쿠시마에서 태어나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내가 오사카까지 가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안 오셨습니다. 남동생 가족은, 일본의 시골은 장남이 산소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 온 집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버리고 피난할 수 없었습니다.”

- 피난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응은 어땠나요.

“남동생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는데, 남동생은 ‘일본 정부도, 후쿠시마현도 괜찮다고 말 하는데 왜 피난을 가야 하느냐’며 반대했습니다. 제 의지가 너무 강하자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후쿠시마는 역시 불안하니까, 간사이 지방이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에는 병으로 누워있는 가족이 있거나 여러 상황들 때문에 피난을 가고 싶어도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는 피난 갈 수 있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소원해졌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부러움과 시기, 질투로 ‘도망간 사람은 (잘)됐네’ 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딸은 어땠나요

“먼저 충격은...(히로코는 첫 마디를 뗀 뒤 눈물이 쏟아져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처음 오사카가 갔을 때 다른 곳에서 이사 온 아이들이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엄마가 네 소개를 할 때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면 후쿠시마라고 하지 말고, 동북지역이라고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을 하면 친구는 ‘동북지역 어디?’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감추는 게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냥 내가 후쿠시마에 살았을 뿐인데, 나를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짓고 평가했습니다. 지금도 말을 할 때마다 친구의 표정이나 눈빛을 살피면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 피난민들에 대한 이지메가 있었나요.

“당시 ‘방사능이 전염된다’고 이지메를 당한다는 뉴스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더 피난을 망설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차에 후쿠시마가 찍힌 번호판은 오지말라고 하거나, 호텔에서도 숙박이 안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런 뉴스들이 나오니까, ‘후쿠시마’라고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히로코는 지금 피난 결정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것이 있나요.

“처음 저는 주변의 눈치, 반응을 볼 수 밖에 없는 나이였습니다. 우리 식구가 주변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 엄마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빨리 결단을 했기 때문에 피폭을 거기에서 멈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왜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나요.

“오사카에서는 모녀 둘만 고립되어 있어서 불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교토에 후쿠시마 피난민들이 한 장소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토에 가니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갔을 땐 주로 다들 딸보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온 피난민들이었고, 여름쯤 되니까, 딸과 동년배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피난을 오기 시작했습니다.”

- 설사 같은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돌이켜보니 저녁 때가 되면 반드시 설사가 났습니다. 이상한게 배가 아프지 않은데 설사가 나왔습니다. 설사는 배가 아프잖아요. 그런데 배가 전혀 아프지 않고, 그냥 화장실에 가면 설사가 나오는 상태였습니다. 딸은 오사카로 간 직후 코피가 멈추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때는 방사능 때문이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교토에서 만난 피난민들과 이야기를 하며 다들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집 앞에 피난을 온 남자아이는 날마다 코피가 났는데, 어떤 날은 정말 코피가 멈추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코피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히 피폭증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병원엔 가지 않았나요.

“설사나 코피 같은 것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은 증상이 없는 것인가요.

“지금은 없지만, 저선량 피폭은 증상이 바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지금 없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안 나타날 거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정기적 검진이 중요합니다. 다른 피난민들은 검진에서 갑상선 결절이나 작은 혹이 발견돼 ‘요관찰’ 진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 피난민이 된 후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교토 거리를 걷다 딸이 우연히 ‘탈원전’ 현수막을 봤습니다. 그것을 보자 내가 체험한 이야기를 뭔가 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후쿠시마 피난민인데, 탈원전과 관련해 뭔가 할 수 있으면 하고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전단지 돌리는 일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직접 마이크를 주고 이야기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도로에서 생전 처음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100세대가 사는 교토 피난민 주택의 무료 보장 기간은 2년이고, 이후에는 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핵 사고로 피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교토와 후쿠시마, 중앙정부에 청원서를 넣었습니다. 서명운동을 하고, 피해자 보고대회 같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2017년 3월에 피난민 주택에 대한 지원은 끊겼습니다. 피난민 100세대는 전부 흩어졌습니다.”

-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었나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의 당사자가 되고 나서 원전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언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일어날 지 모릅니다. 현재 간사이와 규슈 겐카이 원전 소송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거리 연설도 하고, 왜 핵발전소가 안 되는지 재판에서 진술하기도 합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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