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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억울하고 서러운 삶에서 솟아나는 억척어멈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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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2년 만의 소설집 ‘은주의 영화’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 향한 관심 여전

역사적 사건들 배경 삼아 민중 삶 부각



한겨레

은주의 영화
공선옥 지음/창비·1만4000원

1991년 등단작인 중편 ‘씨앗불’에서부터 공선옥 소설의 성격은 뚜렷했다.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랑시에르가 말한 바 ‘몫 없는 자들의 몫’이 공선옥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좋았다. 등단작을 비롯한 공선옥의 초기 소설들에서 그런 면모는 광주 5·18을 매개로 해서 드러났다. 공선옥 소설 주인공들은 5·18에 연루되었으면서도 주역으로 부각되거나 영웅적 삶과 죽음으로 기림을 받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5·18의 일부이기는 했으나 훈장은커녕 영광의 상처도 그들 몫은 아니었고, 5·18이라는 역사의 화인에 찍힌 그들의 이후 삶은 다만 비루하고 던적스러울 뿐이었다.

<명랑한 밤길> 이후 무려 12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은주의 영화>에서도 공선옥 소설의 그런 특징은 여전하다. 표제작인 중편에서 화자인 영화감독 지망생 은주의 이모 상희는 5·18 때 계엄군들이 개와 닭들에게 총을 쏘는 모습을 본 뒤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총을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계엄군에게 대들다가 다친 것도 아닌 상희가 5·18 부상자로 인정 받을 리는 만무하다. 소극(笑劇) 같은 비극은 더 이어져, 1989년에는 상희와 은주가 두루 아는 소년 박철규가 조선대생 이철규 의문사 와중에 유탄을 맞듯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대학생 철규가 부럽더라고, 그때는. 우리 철규는 어떻게 죽었는지, 열한살 우리 철규의 죽음을 밝혀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라는, 철규 엄마 박선자의 하소연은 공선옥 소설의 주제를 대변한다.

한겨레

짧은 단편 ‘행사작가’에서 작가 케이(K)의 대학 동기였던 에이치(H)는 (아마도 1980년) 5월에 고향인 전남 담양에 다녀온다며 나갔다가 광주 상무대 영창에 갇혔고, 풀려난 뒤에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결국 고향 저수지에 몸을 던져 젊은 목숨을 끊는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초경을 겪고 신작로를 가로질러 뛰어가던 소녀는 영부인 저격 소식에 깃발을 달고 달리는 지프차와 마주친다. ‘읍내의 개’ 말미에서는 가출하고자 버스 터미널에 간 주인공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 뉴스를 듣는다. ‘염소 가족’에서 유신헌법 통과 뒤 교사 일을 그만두어야 했던 고령의 아버지는 박근혜 탄핵 소식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감격해 말한다. “박정희가 파면됐구나, 야아, 박정희가…”

쌍용차 사태를 배경으로 삼은 ‘설운 사나이’에서도 파업 투쟁은 소설의 중심 소재가 아니라 희미한 밑그림으로 바탕에 깔릴 뿐이다. 파업에 이르게 된 정황과 결과보다는 파업 노동자의 늙은 어머니가 탄식하듯 내뱉는 말에 작가의 의중이 실려 있다. “사는 기 이케 서룹다.”

억울하고 서럽고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 공선옥 소설 주인공들 삶의 주요 내용이다. 하나같이 딱하고 답답한 사연투성이인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야성의 활력이 솟구친다는 것이 공선옥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읍내의 개’에서 집을 나가 다방 마담 집에 머물던 아버지가 열흘 만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게의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우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날밤 두영전기 기물들이 경쾌하게 부서지고 명랑하게 깨지고 통쾌하게 날아갔다.” ‘순수한 사람’에서 낮술에 취한 노모가 모처럼 친정을 찾았던 딸에게 하는 작별의 말은 판소리 사설을 연상케 하는 리듬과 역설적 신명으로 한껏 출렁인다.

“가거라, 싹 다 가부러라, 가서는 이 악물고들 살어라, 못난 느그 엄씨는 느그들한테 암것도 줄 것이 없다. 느그 어매 젖은 진작에 보타져불고 수중에 일전 한닢이 없다, 시방. 그렁게 느그들은 맘 모질게 묵고들 살어라잉.”

이 어머니의 당부는 표제작에서, 모진 일을 당했던 상희가 스스로를 위로하듯 격려하듯 하는 말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 이런 무조건적인 생명에의 공감과 역성이 공선옥 소설의 단골 주인공들인 억척어멈의 세계관의 바탕을 이룬다 하겠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의 소녀의 초경, 그리고 ‘읍내의 개’의 주인공이 터미널에서 겪는 생리는 장래의 억척어멈으로서 그들에게 내재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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