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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그들만이 정승, 판서가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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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한겨레

1804년 다산은 귀양지 강진에서 ‘하일대주’(夏日對酒)란 시를 짓는다. 강진 읍내 주막집에서 거주하던 어느 여름날 술을 마시고 쓴 것이다. 술을 마시고 쓴 시라고 해서 귀양객의 객쩍은 푸념은 결코 아니다. ‘하일대주’는 당시 조선사회가 앓고 있던 병통을 에누리 없이 꿰뚫는다. 한 대목을 읽어보자. “당당한 수십 가문이/ 대대로 국록을 삼켜오던 중/ 그들마저 패거리가 나뉘어/ 엎치락뒤치락 서로 죽고 죽이며/ 약한 놈 살점을 강한 놈이 씹어 먹더니/ 대여섯 힘센 집 남아/ 그들만이 정승, 판서가 되고/ 그들만 감사(監司)와 원님이 되네/ 승지 벼슬도 그들이 하고/ 사헌부, 사간원도 그들 몫이네/ 모든 벼슬은 그들의 차지고/ 재판도 오로지 그들만 맡네.” 소수 가문이 관직을 독점한다는 말이다. 혹 시인의 과장이 아닌가. 하지만 리얼리스트 다산의 말이 아닌가.

다산의 말은 사실 그대로다. 조선사회에서 관직은 유일한 최고의 사회적 가치였다. 관직의 보유자 곧 관료는 시험, 곧 과거를 통해 선발하였으니, 나름 합리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과거는 형식일 뿐이었다. 과거에 합격해도 출신 지방과 당파, 가문에 따라 진로가 엇갈렸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를 제외한 지방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웠고, 합격한다 해도 고급관료가 되는 길은 거의 막혀 있었다. 권력과 명예, 부를 얻을 수 있는 소수의 관직을 두고 사족 내부에서 격렬한 투쟁, 곧 당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선호하는 좋은 관직은 특정 지방, 특정 당파, 특정 가문의 독점물이 되었다. 다산이 1804년 여름 강진의 주막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은 서울에 세거(世居)하는 노론 가문의 사유물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경기도·충청도의 사족과 소수의 소론과 남인이 끼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다산의 경우처럼 배제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니 조선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었을 것인가. 아무리 심성이 올바르고 똑똑하다 한들 상것으로 태어났다면, 서얼로 태어났다면, 양반이라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양반으로 태어났다면, 당색이 노론이 아니라면, 그래서 철이 들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 자기 삶을 스스로 망치고 만다. 다산은 같은 시에서 지체가 낮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평민의 자식이 “책이고 활이고 다 던져 버리고/ 쌍륙, 골패, 마작, 공차기로/ 허랑하게 자기 재능을 이루지 못하고/ 촌구석에서 늙어 묻혀버린다”고 말한다. 한편 귀족가의 자식은 타고날 때부터 정승, 판서, 승지, 대간 벼슬을 대물림하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열의가 있어 공부를 하겠으며 학문을 하겠는가. 그 역시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쪽도 결국은 자신을 망치고 타락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재벌의 자식은 재벌이 된다. 상식이 된 일이다. 그런데 요즘은 대형교회의 목사도 세습이다. 어떤 말로 분식(粉飾)해도 본질은 저들만이 정승, 판서가 되어 부귀영화를 독차지하려는 수작이다. 그리고 그 수작에 이 사회는 희망 없는 사회가 된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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