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9 (수)

우경화 부채질하는 ‘양복 입은’ 일본 우익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본 우익 역사·계보 추적 논픽션

천황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그들

풀뿌리 대중운동으로 주장 실현시켜

“극우 분위기 탄 일반인들이 주체”



한겨레

일본 ‘우익’의 현대사-‘극우의 공기’가 가득한 일본을 파헤치다
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오월의봄·1만6000원

1969년 약 6천명이 사는 일본 오카야마현 나기정에서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의회에서 ‘대일본제국 헌법 복원 결의’를 가결했다. 2차 대전 패전 이후인 1947년 시행된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도 아니라, 아예 메이지 시대의 헌법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결의 제안 이유서는 “주권 재민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영국과 미국을 모방하면서 상징 천황을 만든다는, 마치 나무에 대나무를 가져다 붙인 듯한 이상한 국체를 만들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하여 사상, 신앙, 학문,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만을 우선하기 때문에 국권이 쇠퇴하는 상황을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일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시골 동네에서 뜻밖에 발생한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때부터 일본의 우파 세력은 헌법 개정을 최대의 정치 과제로 내걸게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헌법 개정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우익’의 현대사>는 일본 우익의 기원에서부터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민정수석 때 청와대 회의에 들고나온 책으로 인해 주목을 받은 ‘일본회의’, 그리고 혐오 발언과 시위를 일삼은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과 ‘넷우익’까지, 일본 우익의 역사와 계보를 밝히고 그 정체를 파헤친다. 지은이인 논픽션 작가 야스다 고이치(55)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라는 책으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우익을 여섯 부류로 나누는데, 전후 질서를 부정하고 천황제로 돌아가자는 ‘전통 우익’, 거리에서 군복을 입고 선전차량을 타고 다니며 행동하는 ‘행동 우익’, 다른 우익들과 달리 ‘반미’를 외친 ‘신우익’, 폭력단이 기반인 ‘임협 우익’, 최대의 우익 단체 ‘일본회의’ 등 종교단체에서 시작된 ‘종교 보수’, 그리고 헤이트 스피치를 일삼는 ‘넷우익’ 등이다.

책은 1932년 2월9일 밤 ‘혈맹단’ 소속 20살 청년이 전직 각료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혈맹단은 “사리사욕에 치우친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만민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암살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살다생’(一殺多生·다수를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다)을 내걸었다. “변혁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후 일본 우익에게 큰 영향을 끼친 독특한 테러 사상”이었다.

일본 우익의 가장 큰 특징은 “천황을 유일, 절대적인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천황의 존재 없이 일본 우익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천황이 스스로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선언하자 일본 우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부 우익은 “패배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죽음으로 천황에게 사죄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에도 천황을 비판한 정치인과 언론사 등은 우익 테러를 당했다.

패전 이후 우익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반미’에서 ‘친미’로 돌아섰다. “망설임이나 고통의 표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전후 우익의 궤적을 보는 데 아주 중요하다.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깃발을 흔들면서 미일 안보를 긍정하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고정화를 돕는 것이 이젠 대부분의 우익이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익은 항상 권력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야쿠자 계열 우익도 등장했고, 1950년대 초부터는 자민당-폭력단-우익으로 연결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일본 우익은 한국 군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한은 공동의 ‘적’이었다. 서로 다른 역사 인식 문제는 유보됐다. “우익은 군부와 연결되었지만 민간과 교류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우익은 한국 군사정권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죠. 한국의 민주화는 결과적으로 우익과 한국의 연결이 소멸했다는 걸 의미합니다.”(미자와 고이치·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 고문) ‘동지’가 ‘적’으로 바뀐 계기가 1987년 한국의 민주화라고 한다.

1960년대에는 우익 학생운동 중심의 ‘신우익’이 등장한다. 미국 주도의 전후 질서를 거부하는 ‘반미’ 우익이었다. 이들은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반대했는데, 일본의 조약 비준을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예속을 강요받는다는 의미”로 봤기 때문이다. 우익 학생운동가들은 이후 ‘일본회의’의 핵심 성원이 됐다.

1970년대 우익의 주역으로 ‘생장의 집’ 같은 종교 보수가 등장했다. 이들은 ‘개헌’을 들고 나왔다. 1974년 생장의 집을 중심으로 종교계 우파들이 모여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좌파에게서 배운 ‘풀뿌리 대중운동’을 벌였다. 1979년 ‘원호법제화 운동’에서 승리했다. 황위가 계승되면 바뀌는 원호(연호) 사용을 법적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우파 세력에게 원호는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생명선”이기도 하다. 이 운동을 토대로 1981년에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최대 목표는 ‘개헌’이었다. 가해의 역사를 지운 교과서를 냈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적극 지원했다. “거리 우익이 ‘제복을 입은 우익’이라면, 이쪽은 어디에나 있을 샐러리맨풍의 ‘양복을 입은 우익’이다. 그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운동을 조직해서 오늘날의 우경화, 반동화의 첨병이 되었다.”(<전후의 우익세력>의 저자 호리 유키오)

1997년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해 ‘일본회의’가 결성됐다. 회원 수는 약 4만명.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조직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소속 의원은 약 280명(2017년 10월). 현재 아베 내각의 각료 대다수가 이 모임 소속이다. 일본회의는 ‘국기·국가법’ 제정,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 교육기본법 개정운동 등을 벌여 성공했다. “일본회의가 보여준 것은 ‘대중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회의가 일본 사회를 지배한다’는 견해는 틀렸다. 그들은 ‘지배’가 목적이 아니라, 공기를 바꾸는 데 힘을 쏟아왔다. 조그마한 부채로라도 몇 천, 몇 만 번 흔들어 바람을 일으킨다면, 큰 나무도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계속 선동한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혐오 발언을 일삼는 ‘넷우익’이 생겨났다. 대표 단체가 ‘재특회’였다. 재특회는 2013년 이래 급속하게 힘을 잃었다. 그 배경에 대한 지은이의 분석이 섬뜩하다. “하나는 혐오발언적인 행동에 대해 사회적 압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특회가 없어도 될 만큼 사회에 이미 ‘극우 공기’가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익의 주체가 행동 우익도 재특회도 아닌 “극우 분위기를 탄 일반인”이라는 것이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동영상 뉴스 ‘영상+’]
[▶한겨레 정기구독] [▶[생방송] 한겨레 라이브]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