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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절망으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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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한겨레

처음 만난 오키나와
기시 마사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한뼘책방(2019)

나는 지금까지 오키나와에 두 번 갔다. 갈 때마다 “너무 아름답다! 천국 같다!” 탄성을 지르면서도 100%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찬란한 파란 바다를 보면서 죽음을 느끼지 않기는 힘들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수는 십이만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고 그 뒤로도 미군기지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우리나라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가 헛간에서 혼자 살면서 아플 때마다 소리를 질러서 미친 여자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 그도 오키나와의 풍경에 반해서 일 년에 한 달씩 머물렀다. 그가 만난 사람 중에 50대 후반의 택시 운전사가 있다. 택시 아저씨의 부모님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생일이 같았다. 사연인즉슨 전쟁 중에 택시 아저씨의 부모님이 살던 마을이 불에 탔고 전후에 호적을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 당시 구장(자치회장)은 마을 사람들의 생일을 조사하는 것이 귀찮아서 전부 자기 생일로 신청해버렸다. 그래서 그 마을 주민은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여자나 남자나 전부 생년월일이 같다.

1933년에 태어나 이시가키 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여인의 어머니는 말라리아에 걸렸다. “어머니가 열이 높아서 힘드니까 물이 든 대야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더니 다음 날 뱀이 반대 방향에서 와서 자기도 물을 마시고 싶으니까 대얏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뱀도 소리를 내면서 마셔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한쪽에는 사람이 다른 쪽에는 뱀이 머리를 담그고 있는 대야의 이편 저편을 상상하게 된다. 타인의 경험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나의 경험도 타인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둠 속에 몸을 담그고 있겠지만 또 그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팔을 뻗어 타인의 경험이란 어떤 것일까,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그나마 어둠에 빛이 스며든다.

또 다른 노인의 전쟁 경험이 있다. “나는 밭에 엎드려 있었는데 눈앞을 봤더니 기어다니는 애가 있어. 애는 살았는데 엄마는 배를 깔고 죽어 있어. 애는 큰 소리로 울면서 부모가 있는 곳으로 기어가. 그걸 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이 애 목소리를 듣고 포탄을 떨어뜨리는 건 아닌가. 애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 그때가 해 질 녘이었는데 동이 트고 나니 애는 엄마 배 위에서 죽어 있었어. (…) 인간이 인간이 아니야. 큰 소리로 신음하는 걸 봐도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면 미군이 그 소리를 듣고 포탄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인간이 이렇게 돼버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웃을 일이 생긴다. “미군이 주는 통조림을 받았는데 열 줄을 몰랐어. 그냥 들고만 있어. 그러다 미군이 가르쳐줬는지 깡통 따개를 끼워서 열 수 있게 되었어. 처음 웃은 게 그때였지. 열었을 때 아아,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했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쁨이란 게 대체 뭔가 싶다. 죽을까 두렵고 살아서 기쁘고 살아남았으니 어쨌든 살아가야 하고. 그러나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자기 모습을 봐버리는 경험은 굴욕적이다. 인간의 삶은 깡통따개 그 이상이고 훨씬 훨씬 큰 것이다. 전쟁뿐 아니라 어떤 비극적인 일 뒤에도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깊게 절망하고 그 절망으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려는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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