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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열녀 조씨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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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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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는 조선시대 여성의 한 존재방식이다. 지금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이지만 그 시대엔 도덕의 최고 경지이자 숭고한 자기완성으로까지 이야기되었다. 조선후기로 오면 <열녀전> 서술이 문사들의 관행이 되다시피 하여 대부분의 문집 속에 적게는 1~2편 많게는 10여 편씩 전해온다. 그런데 이들의 글을 읽다보면 감동은 고사하고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다. 열녀를 선택하게 된 피치 못할 상황이라든가 삶과 죽음에 대한 여성의 자기 이해가 있었을 테지만, 남성 문사들의 열녀는 삼강(三綱)의 윤리를 향해 ‘장렬하게 전사한’ 성공담에 가깝다. 주문 제작된 남성 문사들의 작품 <열녀전>에서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통스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가 없다. 하지만 열녀의 자기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남성 문사들의 기록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주변 자료를 통해 맥락적 이해를 넓혀가는 방법으로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자료를 넓고 깊게 파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끌려나오기도 한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땅, 노년에 들어선 배천 조씨(1706~1758)는 남편이 죽자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을 감행한다. 그의 죽음은 같은 마을에 살던 대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에 의해 기록되었다. 글의 용도는 국가 공인의 열녀‘증’을 따내기 위한 ‘정문’(呈文)으로, 그 내용은 심사자를 흥기시킬 수 있도록 극적인 상황을 담아야 했다. 집필자 안정복은 열녀 조씨의 남편 고 정광운(1707~1754)과 20년 지기 동네 친구로서 그 집안의 부탁으로 짓게 된 대작(代作)임을 먼저 밝힌다. 다시 말해 정씨 집안이 기획하고 당대의 문사 안정복이 붓을 잡은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씨는 남편이 죽자 곧바로 따라 죽으려고 수 차례 시도하지만 발각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한다. 그때마다 그는 ‘3년 상중(喪中)에 죽으면 된다’는 식으로 자기 다짐을 한다. 그리고 3년 내내 죽으로 연명하며 빗질은커녕 세수도 않고, 옷에는 이가 득실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남편의 시체를 덮었던 이불과 시체 밑에 깔았던 자리를 이부자리로 쓰면서 자신이 죽으면 염(殮)에 쓰라고 한다. 뭇 자제들이 울면서 평소대로 돌아오기를 권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고 남편의 탈상이 이루어지기 전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조씨의 죽음은 ‘쇠미한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자 ‘그 열렬한 기상과 꿋꿋한 성품은 아무나 좇을 바가 아니라’고 묘사되었다. 기획자들은 이 기록을 광주부에 제출하며 왕에게 전달되어 정려의 특전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제출한 끝에 조씨는 ‘국가 공인 열녀’가 된다. 8명의 자녀에 손자까지 둔 53살의 조씨는 왜 이 괴기스러운 죽음의 길을 선택했을까. 집안에서 불러주고 순암이 대신 작성한 조씨의 죽음은 사실에 입각한 것일까. 통상 배우자의 죽음에 심신의 피로를 이기지 못한 연로한 배우자가 자연사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로 볼 때, 그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의 성품은 규범에 충실한 교과서적인 유형으로 남편의 상에 임하는 태도를 짐작케 한다. 행장에 의하면 조씨는 4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가 3번을 더 장가들어 상처(喪妻)하는 바람에 친정의 부모를 위해 다섯 차례의 상을 치렀다. 모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애모의 예를 다했다는 것인데,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러면 열녀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남편 정광운은 24살 때 정시(庭試)에 급제하지만 ‘풍류가 지저분하다’는 평이 따랐다. 실록에 의하면 그는 양녀(良女)를 겁탈한 죄로 파직되는데, 순암이 쓴 정공(鄭公)의 행장에는 “너무 똑똑하다보니 시론(時論)의 시기를 받아 출세 길이 순조롭지 못했다”고 썼다. 무엇이 정공의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두 기록에 공통된 내용으로 ‘여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실록은 ‘양녀 겁탈’이라고 했고, 순암은 ‘소실(小室)을 얻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라고 했다. 어쨌든 정절 자살을 감행한 조씨와 ‘지저분한 풍류’의 정공이 부부로 묶이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삼강의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열행(烈行)은 당사자 여성의 뜻이라기보다 다양한 시선에 의해 주문되고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결의 형태를 띠어 그 죽음이 주체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권유되거나 강요되는 방식의 사회적인 타살에 가깝다. 남편 정공은 술과 사람을 좋아하여 가정 경제에 무심했고, 직언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를 즐기는 비분강개형으로 관직의 제수와 삭탈이 반복되었던 삶이었다. 살림은 늘 빈곤을 면치 못했고, 그나마 과거를 통과한 아버지와는 달리 네 아들의 장래는 기약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씨의 죽음을 의미화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자제들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 공인의 열녀‘증’을 받는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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