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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유규철의 남극일기] 남극선 치명적인 술버릇…대원 뽑을 땐 만취 테스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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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최종회: 힘들었던 순간들



올 초부터 시작된 남극일기가 이제는 마무리를 지울 때가 되었다. 처음 제안을 받고 장기간 연재라 정말 고심을 했는데, 막상 끝낼 시간이 되니 독자들께 유익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지 않았나 후회스럽고 나보다 더 고생한 대원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해 아쉽다.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약 13개월 동안 고립된 환경에서 같이 고생해준 대원들에게 먼저 감사한 마음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한다. 하지만 이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께 남극에 도전하는 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제2의 장보고 중심의 남극일기가 분명히 나오리라 믿으면서 마지막 이야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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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남극 세종기지에서는 제17차 월동연구대원이 조난 당한 동료를 구조하려고 출동했다가 고무보트가 강풍에 뒤집혀 전재규 대원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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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위험 상존하는 남극기지



사실 대장으로 임명받고 남극으로 떠나면서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대원들의 사고였다. 남극은 인류의 접근도 어렵고 극한의 위험한 환경이다. 극지연구소는 세종기지에서 월동대 중 한 소중한 생명(고 전재규 대원)을 잃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약 20년 가까이 남극 탐사를 경험하면서 나 자신도 여러 번의 위험한 순간을 겪었다. 세종기지 해상에서 고무보트 엔진이 멈춰서 표류할 때 다른 고무보트로 구조된 적도 있었고, 칠레 프레이 기지에서 맥스웰만 바다를 건너 세종기지로 들어가다가 악천후에 겁에 질린 적도 있었다.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서 프로펠러 공군기로 남극으로 들어갈 때 엔진 하나에서 불이 나서 다시 회항한 적도 있다. 어떤 하계 대원은 기지 야외 작업 중 저체온증이 걸려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있었고 아라온 항해 탐사 도중 헬기가 기상 악천후로 돌아오는 도중 큰 사고가 날 뻔도 하였다. 지금도 가끔 남극에서 소형 비행기나 헬기 사고 또는 화재 사고가 들린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이라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월부터 2월까지 남극의 여름이라 기지를 거점으로 남극 현장 연구가 활발해진다. 장보고기지도 예외 없이 많은 하계 연구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월동대는 하계 연구 지원 임무에 힘써야 한다. 해상 활동이 전부인 세종기지와 달리 장보고기지는 육지 기반의 연구가 대부분이고 연구 지역이 멀어서 헬기 운영이 필수적이다. 4대의 헬기가 항상 대기하고 있으며 연구 지역에 구름과 바람이 없는 화창한 날씨에만 운영되며 조종사들의 최종 판단에 따라 기지 대장이 헬기 운영을 당일 허락한다. 사실 기상에 따른 헬기 운영 기준이 있어서 잘못된 판단으로 운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와 헬기의 정비 오류는 예측할 수 없어서 매번 헬기가 무사히 돌아와야만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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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대륙 장보고과학기지 전경. 세종과학기지에 이어 남극에 건설한 대한민국의 제2과학기지다. [사진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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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라도 나면 진짜 대형사고



하계 기간 중 약 100명 가까이 거주하는 본관동은 서로 자리를 찾아 있기도 힘들다. 한 숙실 당 3~4명이 자야 하니 서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화재라도 나면 정말 대형 사고라서 화재 예방을 위한 교육이 요구된다. 인원이 많으면 전원 사용도 많아지고 실내 먼지가 많아져 코드 화재가 발생할 수 있으며, 야식을 위한 전열 취사도구도 사용에 주의한다. 가장 주의하는 것은 애연가들의 흡연이다. 자칫 담배꽁초가 단서가 돼 화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관동 주변 몇 곳이 흡연 장소로 지정되어 있다.

한 번은 외부에 나가 있다가 본관동 전체에 화재 경고 메시지가 울려 급하게 돌아오는데 한 대원이 화재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들어보니 어떤 대원이 흡연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재떨이에 버렸는데 다른 꽁초들과 연소하여 큰 연기가 나면서 본관동 천정의 가스 경고등이 작동되었다고 한다. 모든 상황을 대원들 모두에게 전달하고 화재 예방에 주의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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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붕과 빙산으로 둘러싸인 남극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론 극도로 위험한 곳이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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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수구 얼어붙으면 눈 녹여 물 만들어야



여름이 끝난 후 3월부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남극 출입이 불가능해지면 더욱 안전사고에 민감해진다. 화재 예방에도 무척 신경 쓰지만, 겨울의 혹독한 영하 20~30도 추위와 초당 30m가 넘어가는 강한 바람은 기지 유지를 어렵게 한다.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기나 물을 끌어들이는 취수구 유지는 대원들의 생사와도 연결될 수 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여분의 총 3대의 열병합 발전기가 안전하게 발전동 내에 있지만, 해수를 끌어들이는 취수구는 외부 바닷가에 있어 극한의 추위에 취약하다. 취수구 아래 후드 밸브가 종종 막히는데 자칫 그냥 두면 발전동과 본관동까지 연결된 배관이 모두 얼어버려 물을 만들 수 없다. 정말 대원들이 눈을 녹여 물을 만들어야 하는 비상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한 번은 초속 20m가 넘는 강풍과 영하 20도의 극야에 취수구가 막히는 비상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다. 전 대원이 바닷가로 나가 한 시간가량 수리 작업을 해야 했는데, 정말 아찔하고 위험한 시간이었다. 모두 무사히 잘 마치고 본관동으로 돌아와 식당에 모여 공허한 표정으로 따뜻한 차를 마시는 대원들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극야 기간 외적인 사고는 비상 대피 시설이 있어 대비할 수 있지만, 대원들의 신체적인 사고는 의사 한 명으로 감당할 수 없을 수 있다. 남극에서 맹장염 수술이 시도된 보고가 있지만, 단순한 사고를 넘어 일련의 질병이나 복합적인 외과 손상은 기지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 특히 남극에서는 골절 사고(약 30%)가 빈번하다. 강한 바람에 문이 닫히면서 손이나 발이 끼거나 미끄러운 얼음에 넘어지면서 생기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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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동기간을 앞둔 2018년 3월 장보고기지의 월동대원 중 한 명인 외과전문의인 채병도 의료대원이 모의수술을 준비했다. 급성 맹장염을 가장한 모의수술이었다. 사전 교육을 통해 선발된 3명의 대원이 보조간호사를 맡았다. [사진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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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기지서 다치면 외부 후송은 어려워



우려했던 일은 실제로 발생했다. 기상대원이 잠시 시설을 점검하러 나갔다가 넘어져 병원에 후송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급히 병원으로 가니 한 쪽 발목이 벌써 퉁퉁 부어있었다. 의료 대원이 일단 X 선 촬영을 하고 진단 결과를 보고한다고 하기에 정말 무거운 마음으로 대장실에서 기다렸다. 단순 골절이라면 깁스를 하면 그만이지만, 복합 골절이면 이른 시간 내로 수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료 대원은 정형외과의가 아니라서 당연히 손쓸 수 없었다. 다행히도 단순 골절로 판정되어 깁스하고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하였다. 다음 아침 회의에 대원들은 대장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제발 외부로 나갈 때 조심 조심하세요.” 이후로 어떤 사고도 없었고 모두 건강하게 극야 기간을 극복하였다.

두 번째로 우려했던 걱정은 과연 우리가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30년의 세종기지와 4년의 장보고기지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대원들 사이에 발생한 갈등들이 많았다. 기지 대장과 총무는 극지연구소의 정직원이지만. 다른 대원은 분야별 능력 시험과 면접을 통해 외부에서 1년 계약 형태로 선발된다. 그러다 보니 각자 인성과 성품을 판단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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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대륙 장보고과학기지에서 본 5월 극야의 하늘과 오로라. 아름답긴 하지만 극야기간은 이처럼 간혹 발생하는 오로라를 제외하고는 칠흑같은 어둠 뿐이다. [사진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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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술버릇은 기지의 위험



인성과 사회성 이외에 따지는 것 중 하나가 술버릇이다. 기지에는 일정량의 술이 보급된다. 파티나 행사, 근무 외 시간에 음주를 즐길 수 있다. 간혹 고약한 술버릇이 있는 대원이라면 갈등이나 싸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비공식적이지만, 대원 선발 기준에 술버릇 테스트도 있다. 대원 선발 이후 남극으로 떠나기 전 일주일간 부산에서 단체로 극지 적응훈련을 한다. 이때 연구소에서 두세 사람이 와서 격려하는 척 술자리를 갖는데, 주량과 상관없이 모든 대원이 반강제로 술을 먹인다. 술버릇을 보기 위해서다. 폭언이나 폭행과 같은 심한 술버릇이 나타날 경우 월동대원 자격 박탈도 고려한다.

월동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군으로 구성돼 있다. 그간 살아온 세대의 사고방식과 사회적인 활동 공간도 서로 다르다. 심리 인성과 적성 검사는 이성적인 답안지일 뿐 남극에서의 추위, 한정된 공간의 고립. 칠흑 같은 밤만 계속되는 극야(極夜)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유발한다. 이런 환경에선 작은 마음의 상처에도 심리적인 불만이 커질 수 있다. 아집이나 욕설ㆍ하대ㆍ경시ㆍ따돌림 등은 월동대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고립된 공간에서 분야별 임무 이외에 청소나 설거지, 당직 근무, 물품 나르는 공동 작업이 있는데,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자칫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발생하면 대장은 월동대 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 하지만 기지 대장의 막강한 권한도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장보고기지에서는 3월부터 10월까지 출입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이 시기에 대원이 말썽을 부리고 대원 간 폭행 사건이라도 발생한다면? 대장으로서 상상하기도 싫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인류를 화성에 보낸다는 계획에 따라 참여자들이 하와이의 가상 기지에서 모의 화성 살이를 2013년부터 수개월 또는 1년간 수행하여 서로 간의 사회 작용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여기의 결과에서도 서로의 갈등이 가장 힘든 스트레스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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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해소에는 운동만한 것이 없다. 기지 내 식당의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고 배구를 즐기기도 한다. [사진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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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해소엔 운동이 제일



장보고기지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월동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아침 회의에 수시로 서로 협력과 솔선수범을 부탁하였다. 서로 평등보다는 솔선수범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자고 말이다. 사실 나만 이렇게 떠들진 않았을 것이다. 어떤 대장이라도 항상 대원들에게 주의하는 부분일 것이다.

갈등의 소지가 큰 정치 이야기는 아예 화두로 꺼내지 않게 하였다. 몇몇 대원은 헬스나 골프ㆍ탁구 등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원들도 있다. 서로 유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식당의 테이블을 모두 치우고 미니 족구나 배구ㆍ‘배탁’(배구와 탁구를 결합한 운동)을 즐겼다. 극야 중간 약 한 달간은 ‘미니 올림픽’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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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기지의 5차 월동대원들이 기지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극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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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5차 월동대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월동 생활에 대원들 간 갈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대장으로서 대원들에게 고마운 것은 어떠한 갈등도 확대되지 않도록 모두 자제해준 태도다. 서로 갈등을 극복하고 임무를 마친 월동대원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아울러 이전 월동대원들에는 없었던 제도인데, 극야 기간 중 심리 전문가와 비밀이 유지되는 두 번의 원격 화상 심리 상담도 대원들의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5차 월동대가 무사하게 임무를 완수한 것은 대원 모든 가족의 힘도 너무나도 크다. 대원들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힘은 가족들의 응원과 관심이었다. 가족의 평안과 관심은 모든 대원의 심리적인 안정과 연결되어있다. 가끔 가정의 불안과 사고가 대원에게 연락돼 그 대원이 의욕 상실과 심리 불안을 겪으면서 임무 수행이 힘들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번 글을 통해 우리 대원 가족들께도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국내로 돌아와 사회에 다시 자리를 잡은 대원들도 있고, 그렇지 못했다는 일부 소식들도 들린다. 남극의 혹독한 환경을 견딘 우리 월동대원들이 사회에서도 굳건하게 이겨나가기를 바라며 각자 하는 일들이 성공하기를 기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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