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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빵을 지배하는 자가 역사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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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인간과 빵의 문화사, 하인리히 E. 야콥의 <육천 년 빵의 역사>

한겨레21

“인생 뭐 있냐? 마음 편하게 맛있는 것 먹는 게 행복이지.” 코미디언 이영자는 ‘먹방’(먹는 방송)에서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가장 짧은 시간에 확실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마음 편하게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하는 거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이 팍팍해지고 사는 게 어려워지면서 이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날은 적어진다. 바쁜 현대인들은 대신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과 ‘쿡방’(요리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감을 느낀다. 그래도 정신적 허기를 달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들에게 책으로 떠나는 음식 여행을 권한다. <한겨레21>은 한가위를 맞아 인생과 음식 이야기가 버무려진 맛깔난 음식 에세이와, 미식가와 음식칼럼니스트들이 꼽은 ‘내 인생의 음식책’을 소개한다. 올가을에는 ‘먹독(讀)’ 함께 하실래요?

요리는 나를 세 번 바꾸었다. 10여 년 전 어느 일요일 오전, 나는 김치칼국수와 콩나물무침이 먹고 싶었다. 중국요리 외에는 배달 음식이 흔치 않았고 ‘혼밥’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그 음식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자 그 음식을 만들 수 있었고 나는 내 끼니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작은 시도지만 나는 그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난 이유



시간이 흘러 요리 실력이 늘자 사람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메뉴를 고민하고 와인이나 디저트에 관심도 생겼다. 더 많은 조리법이 필요했고 요리책을 보러 대학 때도 다니지 않던 도서관을 드나드는 습관이 생겼다. 어머니도 학교도 하지 못했던 일을 요리가 한 셈이다. 두 번째 변화였다.

이때 본 책들 가운데 한 권이 <육천 년 빵의 역사>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요리작가·음식저널리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꿈꾸게 됐다. 요리가 맛과 멋을 중시하는 창조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인류 지혜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인식론의 범주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전에 무심코 지나친 배추 한 포기, 고등어 한 마리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20년간 해오던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쉰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였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진이 장식한다. 600쪽 넘는 두툼한 책의 첫 장이 왜 데메테르였을까? 저자는 빵은 과학이며 정치며 전쟁 물자며 생명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빵을 지배하는 자가 역사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빵이 이런 지위를 차지한 역사적 계기는 그리스의 여신 데메테르였다.

여성에게 투표권도 없고 올림픽마저 못 보게 했던 남성 중심의 그리스 사회가 여신을 상석에 모신 것은 그들이 빵을 가능케 하는 농업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자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인 저자는 데메테르의 권능이 로마 곡식의 여신인 케레스를 거쳐 예수의 어머니 성모마리아로 옮겨졌다고 해석한다. 성모마리아는 쟁기질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 서유럽의 새로운 지배자인 게르만족을 설득하는 명분으로도 쓰였다. 이 과정이 기독교가 유럽에 자리잡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빵을 단순한 먹거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종교·역사·과학·정치 등 대부분 분야의 관점을 총동원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원전 4천 년부터 현대까지, 그리고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까지 모든 대륙의 문명사를 촘촘하게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빵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신화와 종교로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이 책이 ‘빵과 밀의 황금가지’라는 찬사를 듣는 이유다. 책을 읽다보면 해박함과 함께 문장 곳곳에 넘쳐나는 특유의 유머와 냉소가 지은이 하인리히 E. 야콥이 기자 출신임을 상기시킨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 책



이 책이 요리책은 아니다. 조리법도 없고 음식 사진도 없는 역사책이다(대신 예수와 성모 그리고 밀을 기르는 농부 그림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만큼 요리와 음식에 대한 내 호기심을 자극한 책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빵의 제국’이자 ‘서양 요리의 종주국’인 이탈리아에 유학 와 있다. 이 책을 내가 인생의 요리책으로 꼽는 이유다.

권은중 음식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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