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하고 “지나치리만큼 자존심 강한” 람 장관
대학졸업 뒤 엘리트 관료 길 걸으며 승승장구
공개·비공개 세차례 사과 뒤 송환법 공식 철회
민간인권전선 15일 대규모 집회 예고
‘반송중’ 시위 앞날 내다볼 가늠자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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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업무 추진에 부족함이 있었다. 홍콩 사회에 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많은 시민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한다.”
누구의 말일까?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다. 언제 나온 발언일까?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에 반대해 홍콩 시민 2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지난 6월16일이다. 람 장관은 이틀 뒤인 6월18일 “혼란의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고 두번째 사과를 했다.
그리고 석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지난 9월4일 람 장관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앞선 두차례로 충분하다고 여겼을까? 람 장관은 여전히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람 장관은 1957년 홍콩섬 완차이 지역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자존심도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8월 말 출장길에 만난 한 홍콩 정부 당국자는 “람 장관이 학창시절 딱 한번 2등을 한 적이 있다더라. 그날 람 장관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람 장관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가톨릭계 여학교를 거쳐 홍콩대학교에 입학한 람 장관은 한때 학생 운동권 언저리를 배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 사회복지를 전공하려 했던 그가 1학년을 마친 뒤 사회학으로 방향을 튼 것도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람 장관은 대학졸업과 함께 1980년에 ‘식민지 홍콩’의 공직사회에 들어섰다. 초임 시절부터 평가가 좋았던지, 그는 공직 입문 2년 만에 ’식민 모국’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 파견돼 개발정책을 공부하기도 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에도 그는 런던 주재 홍콩경제무역청장(2004~06)으로 영국에서 근무한 바 있다.
람 장관이 영국 시민권을 포기한 것은 지난 2007년의 일이다. 그가 홍콩 정부 발전국 국장에 임명될 무렵이다. 발전국은 기존에 나누어져 있던 환경, 노동, 주거, 토지개발 등의 업무를 통합해 만들어졌다. 홍콩 도심 개발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란 뜻이다.
5년 뒤인 2012년 렁춘잉 행정장관 취임 뒤 그는 홍콩 정부의 ‘2인자’라 할 정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홍콩 시민들이 행정장관 직접 선거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79일 동안 도심 점거시위를 벌였던 2014년 우산혁명 당시 시위대 대표단과 면담을 한 그는 “동의할 수 없다는 점에만 동의했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거침없는 ‘친중국’ 행보를 보인 그가 홍콩 내에서 ‘철의 여인’, ‘홍콩판 마거릿 대처’ 등으로 불리며 ‘강경파’로 분류됐던 배경이다.
2017년 행정장관 선거에 후발 주자로 뛰어든 람 장관은 중국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선거인단 1200명 가운데 777명의 표를 얻어 무난히 당선됐다. 그해 7월1일 홍콩 반환 20주년을 맞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재한 취임식에서 그는 “홍콩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행정장관으로서 홍콩 사회에 오늘과 같은 막대한 혼란을 초래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선택할 수 있었다면, 깊은 사과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여러분의 용서를 구한다.”
람 장관의 세 번째 사과는 8월 마지막 주 기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공개’로 이뤄졌다. <로이터> 통신이 입수해 3일 공개한 녹취록을 보면, 그는 “홍콩인들이 중국 본토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송환법을 추진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그간 공개 석상에서 보여온 행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발언이 공개된 다음날인 4일 그는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등 현지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람 장관이 송환법 공식 철회를 최종 결심한 것은 지난 8월24일이다. 그는 이날 홍콩 사회 저명인사 19명을 행정장관 공관으로 초대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 절대다수가 송환법 공식 철회와 경찰의 폭력·과잉진압 의혹을 조사할 독립위원회 구성 등 시위대의 5대 요구 가운데 2가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첫 반송중 시위는 지난 6월9일 열렸다. 홍콩 시민 7명 가운데 1명꼴인 100만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후 13주 동안 시위가 그치질 않았지만, 람 장관은 △이미 송환법 추진을 중단했고 △폭력 시위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며 송환법 공식 철회는 거부해왔다. 지난 석달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만 홍콩 시민의 목소리보다, 저명인사 19명이 내놓은 조언을 무겁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람 장관은 경찰 폭력 조사를 위한 독립위원회 구성 요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포된 시위대에 대한 사면과 시위대에 대한 폭도 규정 철회, 행정장관 직선제 등 나머지 요구 사항도 “원칙의 문제”라며 거부했다. 그리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람 장관을 포함한 홍콩 정부 고위 관료 누구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홍콩민의연구소가 8월27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람 장관의 지지도는 24.6%에 그쳤다. 역대 홍콩 행정장관 지지도 가운데 최저치다.
람 장관은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에 앞서 4일 오후 공관에서 100명에 가까운 친중파 인사들을 만났다.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람 장관은 “송환법 공식 철회를 통해 온건파를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송환법 철회가 시위대를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리해 대응하기 위한 포석이란 얘기다. 결국 온건파의 시위 참여가 줄어들고, 강경파만 거리에 남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는 뜻이다.
하지만 송환법 철회 결정에 대한 홍콩 시민사회의 반응은 싸늘했다. “내용이 너무 없고, 시점도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살점이 썩어들어가고 있는데, 고작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겠다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주말 홍콩 도심을 가득 메운 수만명의 시민들은 “5대 요구조건, 단 하나도 빠질 수 없다”고 외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석달여 100만(6월9일)-200만(6월16일)-170만(8월18일) 시위를 이끌었던 홍콩 시민사회 연대체 민간인권전선이 15일 다시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람 장관의 계산대로 홍콩의 ’온건파’는 집회에 나오지 않을까? 벌써부터 이날 집회가 반송중 시위의 앞날을 내다보는 가늠자 구실을 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앞서 당국의 불허 결정에 따라 민간인권전선이 예정했던 집회와 행진을 모두 취소한 8월31일 수많은 홍콩 시민들이 비 내리는 도심을 물처럼 흘렀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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