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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멸망 후에도 200년 저항하며 살았던 발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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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 발간

거란 속국민으로 살기 거부

정체성 지키려 부흥운동 지속

자멸설은 거란 중심의 中 해석

'발해는 한국사 일부' 재증명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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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으로 불리며 동북아시아 강국으로 자리하던 발해(698~926년)는 거란의 침략을 받고 22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망국민 발해인들은 유민(流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나라는 없어졌으나 발해인들의 저항과 부흥운동이 멸망 이후 200여 년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연구서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는 멸망 이후 뿔뿔이 흩어진 발해인들의 저항과 부흥운동 등 유민사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한 발해연구는 쇠퇴기와 몰락과정에 집중됐다. 중국학계는 발해를 말갈족을 주체로 한 나라로 보고 중국사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부족으로 쇠퇴기에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해 전쟁에서 패망했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연구서는 발해 유민사를 통해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통치하려고 했지만 발해인의 저항이 계속됐고, 통치하기 수월한 요양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하지만 거란의 속국민으로 살기를 거부한 발해인들은 고려와 요동, 요서, 동몽골 등으로 이주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부흥운동을 이어갔다.

‘요대 발해인의 성격과 존재 양태’를 연구한 나영남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도 유민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집단을 이루며 200여 년간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동북아 역사의 중요한 축을 이뤘다”면서 “그들은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부흥운동을 전개했고 이와 더불어 소극적인 저항으로 고려를 비롯한 중원으로의 내투를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발해 유민의 끊임없는 저항과 부흥운동은 발해의 탄생 배경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발해를 말갈족을 주축으로 한 국가로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중국 학계의 주장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발해 유민은 멸망 이후 200여 년간 거주지와 상관없이 거란인, 송인, 고려인이 아닌 발해인으로 분류됐다. 발해를 정복한 거란 역시 발해인을 한인과 별개로 대우했고, 한족의 송나라도 발해인을 자신들과 별개의 사람들로 취급했다.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동단국의 운명과 발해 유민’을 주제로 한 연구를 통해 “발해 유민의 향방이나 처우, 부흥운동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주요 자료는 ‘요사(遼史)’ ‘거란국지’ ‘송사‘와 같은 거란과 송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며 “중국 학계의 주장과 달리 한족이 절대다수인 오늘날의 중국이 말갈족과 혈연적·역사, 문화적·역사 계승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납득할 만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연구서는 발해 멸망이 부패, 나약, 내분 등에 따른 몰락이라고 설명해온 기존연구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발해는 거란이 세력을 확장할 시기 신라, 고려는 물론 일본 등과도 활발한 외교를 전개하며 거란의 공세에 대비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유적 발굴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그동안 발해 멸망이 곧 몰락이라는 이해가 주류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그러나 연구 사료가 거란이 20여 년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이룬 발해 정복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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