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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시선]‘부자의 품격’이란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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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교수인 자녀가 대학원 장학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부유했다. 모든 장학금이 집안의 금고까지 따져가며 지급기준을 정하진 않는 이유를 알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부모 도움을 성인이 되어서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자녀 부양을 중년이 되어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뿐더러 복잡한 개인사를 죄다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전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양 융단 폭격을 가하는 건 가난을 줄 세워 돈을 주는 방식이 불평등을 줄여줄 거라고 믿어서다. 듣기에는 아름다운 세상 이치처럼 보이지만 불평등이 자연스레 유지되는 케케묵은 관념일 뿐이다.

경향신문

‘부자의 품격’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 사회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적 시선이 매우 견고하다. 품격 없이 그런 돈을 왜 받는지를 추궁하며 등장하는, 그런 돈을 받을 만한 이들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로 품격이 없다. 방 한 칸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편의점 음식으로 한 끼를 겨우 때우는 안쓰러운 사례들이 누구는 왜 비루해야 하는지를 사회구조적으로 따지는 논의로 확장되면 다행이지만 실상은 ‘착한’ 부자를 찾는 습관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의 통 큰 기부 덕택에, 그리고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덕분에 현금 혜택을 받은 자들은 ‘도움을 받았다는’ 족쇄를 차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언제나 성실해야 하고 특히나 세상 욕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은 가난하면서, 그래도 세상은 살기 좋다는 이론을 옹호해야 한다. 주어진 규격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라는 지탄이 등장한다. 사람을 순응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을 아는 기업들이 사회공헌 활동에 많은 비용을 쓰는 건 당연하다. 여기저기 장학금을 많이 뿌릴수록 기업의 탐욕을 비판하는 세상의 크기도 줄어드니 말이다. 그러니 나눔을 실천하는 부자 이야기가 많은 곳에서 복지제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빨갱이 취급을 받는다.

부자의 품격을 운운하는 사회에서는 부자들의 기만이 성행한다. 후광을 마다하고 일부러 힘든 삶을 택했다는 이야기는 왜 이리도 많은가. 가난하면 가난이 스토리로 발현될 수 없지만 부자가 잠시 가난하면 인생 경험이 폭넓다느니, 밑바닥 삶을 이해한다느니 온갖 긍정적인 수식어가 붙는다. 장기간 저임금 노동을 하는 자는 계속 가난하지만, 장래에 도움 될까봐 단기간 거친 노동을 일회성으로 선택한 이들은 그 경험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대중들을 현혹시킨다.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 세상 물정 아는 부자랍시고. 칼국수는 누구나 먹는데, 그걸 먹었다고 ‘착한’ 사람이 되는 집단은 정해져 있다.

자기계발서들은 이를 명문가의 엄격한 자녀교육이라 하지만, 밑바닥을 고의적으로 체험해봤다는 원래 부자가 성인이 되어 불평등에 ‘격렬히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일도 경험해봤기에 자신의 현재를 ‘운’과 무관한 ‘노력’의 결과라고 포장한다. 그럴수록 ‘나도 경험해봐서 안다’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의지가 부족하다면서 혐오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따위 기만보다 차라리 자신은 죽어도 서민의 삶을 알 수 없는 유복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성찰이 솔직하다. 강남좌파면 어떠한가. 가난의 원인은 가난뿐이라는 태도를 지니고 이를 구체적으로 해결할 정치권력에 힘을 실어줄 때 사회의 불평등도 유의미하게 줄어들지 않겠는가.

부자의 품격이란 말 자체가 이미 세상이 굉장히 불평등하다는 증거다. 교육의 공공성 회복, 주거비용의 안정화 그리고 적당한 노동으로도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는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면 누구도 돈 있는 사람에게 특정한 행동을 기대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은 은총을 베풀고 잘나지 못한 사람은 그것에 감사를 표함이 마땅하다는 생각은 불평등한 세상이 그대로 유지되는 연료일 뿐이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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