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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작품에 바치는 예술가 희생은 불가피한 선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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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 우리나라 공연예술계 스타들 총집합 / ‘정재일표 음악’ 무대 전율 생생히 전달 / 비주얼디렉터 여신동의 ‘빛의 향연’ 볼만 / 발레리나 김주원, 제이드 역 도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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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연예술계 스타가 모인 ‘콜라보프로젝트1.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작곡가 정재일과 비주얼디렉터 여신동이 만들어낸 무대가 빛난다. PAGE1 제공


진짜 예술과 가짜 예술, 만들어진 예술가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예술가. 작품에 바치는 예술가 희생은 불가피한 선택인가.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던지는 물음이다.

작곡 정재일, 비주얼디렉터 여신동, 현대무용가 김보라, 발레리나 김주원, 국악인 이자람 등 당대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각 분야 스타가 모인 무대는 ‘연극’이라는 틀 위에 쌓아올린 ‘미디어아트’이자 ‘무용극’, ‘뮤지컬’이다. 이들을 한데 모은 건 헤드윅, 록키호러쇼, 더 데빌, 광화문연가 등 여러 창작·라이센스 뮤지컬에서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 온 이지나 연출이다. 2016년에도 ‘도리안 그레이’라는 창작 뮤지컬을 만들었던 이지나는 강렬한 개성의 제작·출연진을 모아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쉼 없이 110분 동안 이어지는 무대를 꽉 채우는 건 역시 ‘정재일표 음악’이다. 때로는 심심한 어쿠스틱 기타·피아노만으로, 때로는 전자음악과 록으로 등장인물 내면과 배경을 객석에 펼쳐 보여준다. 명작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예술가의 광기와 파멸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혈한 예술계 거물 오스카가 부르는 ‘꿈’, ‘허 보이스’, ‘편지’ 등 정재일이 만든 네 곡의 노래도 한결같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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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대중음악, 연극, 뮤지컬, 창극, 무용 등 예술 전방위로 영역을 넓혀온 작곡가 정재일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대목은 ‘포트레이트Ⅰ,Ⅱ,Ⅲ’이다. 극 전개의 분수령이 되는 주인공 제이드와 유진의 초상화 테마로서 반젤리스와 한스 짐머를 연상시키는 스케일의 선율로 압도적인 예술품 앞에 선 전율과 감동을 객석에 생생히 전달한다.

뛰어난 음악과 함께 무대를 채운 건 비주얼디렉터 여신동이 만든 빛의 향연이다. 무대는 의자 네댓 개와 두세번 등장하는 테이블이 거의 전부일 정도로 단순하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절제된 사용이 때로는 미술관, 때로는 현란한 클럽을 만들어낸다. 조명 자체가 바닥에 도형과 문양을 만들고 크기를 바꿔가며 등장인물 내면과 외적 갈등을 묘사할 때도 있다. 주요한 장치로는 초대형 거울과 입면 거울이 섬세한 예술가의 자화상을 구현한다. 끝 무렵 공개되는 제이드가 그린 유진 초상화는 정재일 음악과 맞물리며 예술지상주의의 결정체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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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이처럼 비범한데 극 전개는 일직선이다. 19세기 말 영국 유미주의의 대표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소설에선 사실상 절정의 순간에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표구된 젊은 예술가로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란 개념만 가져왔다. 주인공은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이나 파리, 런던쯤의 예술가 ‘제이드’, ‘유진’, ‘오스카’.

매혹적인 외모와 창의성을 지닌 제이드는 남다른 심미안을 지녔으나 마케팅으로 예술가를 띄우고 작품을 사고팔며 예술시장을 조작하는 거물 오스카에게 발탁된다. 모친이 정신병원에서 죽은 내력을 지닌 제이드는 갑작스레 쏟아진 갈채와 조명 앞에 자신의 예술이 ‘진짜배기’인지 고민하며 방황하고 타락하다 광기를 자양분 삼은 창작에 내몰리게 된다. 누구보다 먼저 제이드의 재능을 발견했던 유진은 제이드를 구하려 애쓰나 오스카는 ‘무엇이 진정한 예술가와 작품을 위한 길인가’라고 물으며 제이드의 파멸을 방조한다.

자멸하고야 마는 제이드의 타락과 방황은 갑작스러우면서도 진부하다. 예술가가 주인공일 때 늘 반복되는 전개려니 한다. 그 결과 “예술은 유일하게 죽음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야. 한 명의 예술가는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기억되겠지”라는 오스카 주장은 냉혈하나 거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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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나 연출은 배우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무대 다양성을 확 넓혔다. 제이드 역에는 우리나라 간판 발레리나였던 김주원과 연극 ‘어나더 컨트리’의 신예 문유강을, 유진 역에는 이미 탁월한 연기를 여러 차례 선보인 이자람을 필두로 박영수, 신성민, 연준석을 선택했다. 덕분에 남·남, 남·여, 여·남, 여·여 다양한 조합이 전혀 다른 성격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또 오스카 역에는 역량 있는 뮤지컬 배우 마이클리, 김태한, 강필석이 무대에 오른다. 지난 14일 낮 공연에선 김주원과 박영수가 좋은 호흡을 맞췄다. 꾸준히 뮤지컬 등에 선 바 있는 김주원은 또렷한 발성을 통한 대사 전달 등 고른 연기를 보여주며 향후 폭넓은 활약을 기대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가 지닌 원체 선한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예술을 위해 파멸의 길과 죽음을 스스로 택한 제이드로 완전히 변신하는 경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열창한 ‘겟세마네’ 이후 독보적 카리스마로 뮤지컬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마이클 리도 이날 무대에서 오스카로 열연했다. 특유의 음색으로 부르는 노래는 호소력이 컸으나 대사 전개에선 때론 어색한 발음이 감상을 방해했다.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11월 10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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