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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20)작은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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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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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나에게

작은언니!라고 부를 적마다

내 마음엔 색색의

패랭이꽃들이 돋아나네

왜 그래? 대답하며

착해지고 싶네

이슬 묻은 풀잎들도

오늘은 나에게

작은언니라고 부르는 것 같아

그래그래

웃으며 대답하니

행복하다

수녀(sister)는

언니(sister)라는 말도 된다지

작은 일에 감동을 잘하고

오직 사랑 때문에

눈물도 많은 언니

싸움이 나면

세상 끝까지 가서

중간 역할을 잘해

평화를 이루어내는

사랑 받는

작은언니가 되고 싶네

- 시집 <작은 위로>에서

며칠 전 서울에 사는 제 여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에 다녀갔습니다. 그에겐 언니가 둘이니 늘 큰언니, 작은언니로 구분해서 부르는데 큰언니가 세상 떠나고 나니 이 작은언니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고 만날 적마다 말하곤 합니다.

작은언니라는 말에 숨어있는 다정함과 따뜻한 느낌을 새롭게 사랑하며 날마다 누군가의 작은언니, 작은누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식구들이 다 맘에 안 들어 때론 가출하고 싶다는 어느 청소년에게,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한 동료를 용서 못해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괴롭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지금 믿는 종교가 맘에 안 들어 다른 종교로 바꾸고 싶다는 이에게 그리고 갈수록 사는 일이 우울하고 재미없어 종종 자살의 유혹을 느낀다는 이에게 나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은 없으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중간역할을 잘하는 작은언니가 되고자 합니다.

어떤 충고를 해야 할 적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낮고 조용한 언니 목소리로 조금은 떨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면 완고했던 상대방의 마음이 순하게 바뀌는 것을 여러번 보아왔습니다. 요즘은 누가 싸워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그러는지 별로 말리는 이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함께 단풍놀이 여행을 다녀오던 중년의 여고 동창생들 중 두 친구가 휴게소에 버스를 세워놓고 큰소리로 싸우는데 다들 방관만 할 뿐 아무도 말리지 않고 서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제가 다가가는 걸 수녀들은 말렸지만 용기 있게 외쳤지요. “친구들끼린데 서로 심하게 욕만 하면 어떡해요. 싸우더라도 고운 말로 싸우셔야지요”했더니 “봐라. 수녀님이 고운 말로 싸우란다. 이제 그만 하자”하며 다들 버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싸움꾼 동료들은 일부러 제게 와서 고맙다며 웃었습니다.

자기가 무얼 잘못해도 꾸지람해 주는 어른이 없다면서 ‘너는 나쁜 놈이다’라고 말해 달라는 편지를 일부러 보내온 어린 독자도 있습니다. 마약중독, 게임중독의 유혹에서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아 힘들다는 사람에겐 어떤 충고를 해야 좋을지, 목욕탕에서 쓰러져서 의식 없다가 열흘 만에 깨어나 중환자실에 있다는 지인에겐 또 어떤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할지, 갑자기 파산해서 집을 저당 잡히고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 슬픈데 힘과 위로가 되는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숙제를 미지의 독자들로부터 받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오늘도 이 힘 없는 ‘작은언니’는 기도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이런저런 궁리로 고민 중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끼리 지속적으로 교묘하게 싸우는 일은 그 누가 말려야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것인지 너무 답답하여 하늘만 쳐다보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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