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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금주의역사 - 9월16~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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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9월19일 제국주의의 최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수단의 파쇼다에서 맞닥뜨린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19세기를 하나의 장편 ‘제국주의 드라마’라고 보면 두 주인공이 클라이맥스가 가까운 세기말에 만난 것이니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 두 나라의 식민활동에서는 활극의 두 주인공이 뜸을 들이듯 충돌을 기피하는 기류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면 주인 없는 땅이 없다시피 한 데다 강대국들이 거창한 구상을 실현하려 하자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영국이 케이프타운(남아공)-카이로(이집트)-콜카타(인도)를 잇는 3C정책을 추진한 것이 그 대표적인 구상이었다.

한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남태평양 식민지와의 교류를 위해 동아프리카의 항구들을 확보하려 부심했다. 그래서 기존의 모로코 등 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동진을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종단하고 프랑스는 횡단하다 보니 수단의 남부도시 파쇼다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당시 양국은 홍해에서의 안전한 항해에 사활을 걸었고, 이를 위해서는 수단 일대의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은 프랑스 군이었다. 육군 대령 장 마르샹이 이끄는 132명의 원정대는 콩고에서 14개월간 동진해 1898년 7월10일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9월18일에는 영국의 허버트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1500명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양국은 한동안 으르렁대다가 결국 프랑스가 11월3일 양보하고 철수했으며, 그것은 현지의 군세가 약해서만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동쪽에서 날로 세를 확장하는 독일의 존재가 더 커보여서 양보했고, 그것은 16년 뒤의 1차대전에서 보상받은 셈이다.

양평(언론인)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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