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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월급날 직원에 돈꾸던 사장의 8년 반전···영상번역 넘버1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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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노’ 이현무 10년 만의 반전

빚만 10억, 살기 위해 싱가포르행

글로벌 OTT 번역 수주로 급성장

드라마·영화 47개어로 자막·더빙

소프트뱅크 투자 덕 2위업체 인수



미디어 현지화 기업 ‘아이유노’ 이현무 대표 인터뷰



태국인이 한국 드라마를, 미국인이 프랑스 드라마를 마음껏 즐기는 시대다. 영상 콘텐트가 이처럼 세계인의 공통 즐길거리가 된 뒤에는 번역업체들의 맹활약이 있다.

전세계 영상물 번역업계 1위 기업은 놀랍게도 한국인이 만들었다. 더 놀라운 건 이 회사가 국내에서 8년간 번역 서비스를 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소위 ‘망한 회사’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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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무(43) 아이유노미디어그룹 대표. 이 대표는 지난 3일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EY의 싱가포르 본부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영인(Entrepreneur of the Year)' 후보 5명에 꼽혔다. [사진 아이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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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미디어 번역 전문 기업 ‘아이유노(IYUNO)’가 그 주인공이다. 아이유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나 온라인 기반 동영상 서비스(OTT) 기업이 만든 영상물을 47개 언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공급한다. 전 세계 15개 지사가 한 달에 다루는 콘텐트만 약 3만 시간에 이른다. 중앙일보는 지난 4일 아이유노의 이현무(43) 대표를 화상 인터뷰해 ‘비즈니스 반전 비결’을 물었다.

이 대표는 2002년 국내에서 창업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아이유노를 만든 뒤 8년간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서비스를 했다. 그런데 한국어 시장은 너무 작아 도저히 번듯한 기업으로 키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주요 고객사와의 계약이 깨지면서 사업은 더 어려워졌다. 그는 “월급날 도리어 직원이 돈을 꿔준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8년간 어렵게 꾸리던 사업은 10억원 빚더미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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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는 지난 4일 싱가포르 본사에 있는 이현무(David Lee) 아이유노 대표와 화상 인터뷰를 했다.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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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기를 ‘더 큰 시장’에서 찾았다. 이 대표는 “다국어 서비스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국적 방송사 70%가 몰려있던 싱가포르행은 생존을 위한 필수 선택이었다”고 회상했다.

8년간의 업력은 싱가포르 현지사업에서 빛을 발했다. 민감한 구어체 표현을 매끄럽게 처리하거나,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표현이나 장면은 융통성 있게 처리했다. 현지 고객들의 신뢰가 쌓이면서 번역 주문이 몰렸다. 대만어 번역 요청이 들어오면서 대만 지사, 말레이어 번역 요청에 따라 말레이시아 지사를 속속 설립했다. 현지어에 가장 적합한 번역을 하려면 현지인을 고용해야 했고 지사도 필요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고객과 함께 성장한 회사”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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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노는 15개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미디어 현지화 기업이다. [사진 아이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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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개발 SW·클라우드·AI 번역…기술력으로 차별화



자체 개발한 클라우드 플랫폼, 인공지능(AI) 자동 번역 등 탄탄한 기술력도 성공 요인이었다. 2000년대 중반 DVD마저 퇴조하던 시절에도 방송사들은 여전히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워드 프로세서에 번역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이를 보고 자막 제작 소프트웨어인 ‘미디어 트랜스’를 개발해 특허를 따냈다. 영상분석 기술로 자막이 들어갈 위치를 자동으로 조절하고, 음성인식 기술로 ‘음성은 있는데 자막은 비었다’고 알림을 보내주는 기술 등이 들어갔다. 이렇게 개발해둔 미디어 트랜스가 싱가포르 진출 후 여러 콘텐트 사업자에게 팔리면서 사세가 확장됐다.



지난 5년간 매출 연 50~100% 성장



방송사 번역 수주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때’가 찾아왔다. 미디어업계에 ‘코드커팅(Cord-cuttingㆍTV 등 유선방송에서 OTT로 시청자가 이동하는 현상)’ 바람이 분 것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현지화 작업이 필요한 영상 콘텐트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OTT 업체들은 그간 만났던 방송사들과는 아예 다른 사업자였다. 클릭 한 번으로 전 세계 스트리밍이 가능한 이 사업자들은 대개 영미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 대표는 미국 지사를 세우고 고객 확보에 본격 뛰어들었다. 글로벌 거대 콘텐트 업체가 하나둘 아이유노 고객사가 됐다. 지난 5년간 연 매출이 50~100%씩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 아이유노 매출 700억원의 70%가 미국에서 나올 정도로 ‘콘텐트 본거지’ 정착에도 성공했다.

그간 미디어 트랜스도 진화를 거듭했다. 클라우드가 부상하면서부터는 미디어 트랜스를 클라우드 플랫폼에 얹어 번역가를 관리하고 AI 번역을 위한 데이터도 축적했다.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검수해주는 AI 엔진도 장착했다. 클라우드를 통해 작업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 번역업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번역가 연락 두절, 벼락치기 번역 등도 사전에 관리할 수 있게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번역기업이 되면서 첫 투자자도 생겨났다. 지난해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아이유노에 240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이 대표는 “미디어 번역은 3~4년 전만 해도 사람이 해야 하는 구시대적 사업, 노동집약적 사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콘텐트 수요가 폭발한 지금은 기술력이 필요한 신사업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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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아이유노와 미디어 현지화 업계 2위인 유럽 'BTI 스튜디오'가 '아이유노미디어그룹'으로의 인수합병 소식을 알렸다. [사진 아이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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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노는 지난 12일 업계 2위의 유럽 기업 ‘BTI 스튜디오(이하 BTI)’를 인수하면서 업계 1위로 올라섰다. BTI의 지난해 매출은 약 1473억원. 매출이 두 배 이상 큰 기업인데도 BTI 측이 아이유노의 기술력과 비전에 공감하면서 인수합병이 성사됐다.



17년간 쌓은 번역 데이터와 AI 엔진이 미래 무기



이 대표는 미래 성장 무기로 ‘AI 번역 엔진’을 꼽는다. 그는 “AI는 쓰레기(데이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오는(Garbage In, Garbage Out)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데이터가 좋아야 인공지능의 정밀도가 높아진다는 의미다. 그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와 오랜 기간 데이터를 쌓은 회사 중 AI 시대에 더 각광받을 곳은 후자”라고 했다. 자율주행차를 만드는 기업보단 주행 데이터를 가진 우버 같은 회사가 성장 가능성이 큰 것과 같은 원리다.

그는 “아이유노의 AI 번역 엔진은 미디어 콘텐트에 적용했을 때 구글 번역보다 품질이 약 2.8배 이상 우수하다”며 “기존의 기계 번역이 웹 문서 위주로 훈련된 문어체 번역인 데 반해, 아이유노 엔진은 일상 언어 데이터로 훈련해 방송과 비디오 스트리밍 산업에 훨씬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17년간 쌓아온 구어체 번역 데이터가 AI와 결합해 아이유노의 경쟁력이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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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아이유노와 미디어 현지화 업계 2위인 유럽 'BTI 스튜디오'가 '아이유노미디어그룹'으로의 인수합병 소식을 알렸다. [사진 아이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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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튜브 같은 개인 채널이 늘어나는 시대에도 AI 번역 엔진은 유효하다”고 했다. 아이유노는 이미 국내 다수의 MCN(1인 크리에이터 기획사)들과 자막ㆍ더빙 작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이 대표는 “적은 비용으로도 누구나 AI 번역을 이용할 수 있는 유튜버 전용 자동 번역 플랫폼을 준비 중”이라며 “아이유노의 번역기술이 영상 콘텐트의 글로벌 확산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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