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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너는 때때로 비에 대해 말하지만 조금도 젖지 않은 채 모든 빗방울을 피해 간다…정다연 등 시인 6명 ‘현대문학 핀 시리즈 4’ 시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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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보영, 정다연, 황인숙(왼쪽부터)


“추락으로 시작한다 추락하지 않는 인간은 게임 참여 의사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문보영 시인(27)의 두 번째 시집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의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배틀그라운드는 외딴섬에 내린 100명의 플레이어들이 점점 좁아지는 원 안으로 들어가며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서바이벌 슈팅게임의 이름이기도 하다. 문보영은 게임의 주요 설정을 차용하면서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쓴 24편의 연작시를 선보인다.

“유저들에게/ 손잡는 기능은 없습니다// 침 뱉는 기능/ 기절하는 기능/ 그리고/ 뒤에서 발로 차는 기능이 있습니다// 방해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합시다// 뒤로 다가가 발로 찹시다// 너는 넘어지는 방식으로 세계에 포함되었습니다”(‘배틀그라운드-송경련이 왕밍밍에 관해 쓴 첫 번째 보고서’)

등장인물 송경련과 왕밍밍은 무한경쟁의 현실을 외면해 게임 속으로 도피한 젊은이들을 상징하지만, 게임 속 섬은 경쟁이 팽배한 현실 모습, 그곳에서 도태되고 탈락하는 젊은이들의 두려움과 불안 등 현실을 반영한다.

“나는 꿈을 꾸며 꿈에서 내가 소외되는 상황을 즐길 줄 알기 때문에. 원 바깥에 오래 있으면 체력이 닳고, 결국엔 아파서 죽어버린다”(‘배틀그라운드-원’)와 같은 구절에서처럼 문보영은 게임의 설정 속에서 꿈을 잃은 채 무한경쟁에 몰린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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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4’로 황인숙, 박정대, 김이듬, 박연준, 정다연 시인의 시집과 함께 출간됐다. 황인숙 시인(61)부터 막내 정다연 시인(26)까지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은 독자적 작품세계를 펼쳐보인다.

정다연 시인의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는 사회적으로 첨예한 이슈인 폭력이나 차별 등에 대한 결연한 시선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첫 시 ‘리액션’에서 정다연은 “줄줄이 쓰러지고 엎어지는 도미노/ 편리한 호명과 위계/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 일순간에 차가워질 것/ 침묵을 깰 것/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라며 기성 사회에 선전포고를 하듯 말한다. 하지만 ‘인간 사랑 평화’라는 시에서 “인간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차별이라는 단어를 케케묵은 양말만큼이나 싫어”하는 ‘너’는 “어쩌면 너도 네가 혐오하는 단어와 점점 닮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만…너는 때때로 비에 대해 말하지만 조금도 젖지 않은 채 모든 빗방울을 피해 간다”며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주체의 성찰과 반성 또한 이야기한다.

황인숙 시인은 사소한 일상에 숨겨진 비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나는 시 스무 편을 담았다. 나이가 들며 병치레 속에 느끼는 비애, 키우던 고양이를 잃은 슬픔 등을 노래한다. 고양이와 함께한 외출을 이야기하는 듯하던 ‘우리 명랑이랑 둘이’에선 “상자에 담겨 나갔다가/ 단지에 담겨 돌아왔네/ 아, 우리 예쁜, 명랑이……”라며 고양이의 장례를 치르고 온 아픔을 담담히 담았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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