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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한국 로봇, 이젠 일본 관절 안달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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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감속기 제조업체 에스피지의 여영길(56) 대표는 16일 "일본 제조사들이 꼭 이 기사를 읽고 우리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일본 제조사란, 전 세계 초정밀 로봇용 감속기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두 개 업체, 하모닉드라이브와 나브테스코를 지칭한 것이었다. 여 대표는 지난 4년간 영업익의 30%를 연구개발에 쏟아부은 끝에 일본의 독점을 끝낼 국산 로봇용 감속기 개발에 성공했다. 그는 "이달 초부터 로봇용 감속기 양산에 들어갔고 다음 달부터는 한국·중국 로봇 제조사들과 제품 실험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로봇용 감속기란 기어를 활용해 모터의 회전 속도를 낮추는 대신 구동력을 높이는 부품으로 로봇의 움직임을 제어해주는 관절 역할을 한다. 대개 야구공만 한 이 작은 부품 값이 전체 로봇 가격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여서, 사실상 로봇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핵심 중의 핵심이다.

1992년 일반 감속기 국산화

지난달 인천 송도의 에스피지 연구개발센터에서 만났을 때 여 대표는 감속기에 들어가는 부품 15개의 제조 공정을 일일이 공개했다. 시커먼 특수합금강 덩어리가 단조 가공을 거쳐 은빛의 톱니바퀴 모양 부품으로 변모했다. 그는 한 팔로 움직이는 협동로봇(인간을 도와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하는 로봇)의 관절 부위에 들어가는 야구공 정도 지름의 감속기를 들어 보이며 "이 제품으로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로봇용 감속기 시장을 우리가 국산화할 것"이라고 했다.

조선비즈

여영길 에스피지 대표가 지난달 인천 송도에 있는 연구개발센터에서 로봇의 관절 부위에 들어가는 야구공 정도 지름의 감속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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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지는 일본이 주도하는 모터·감속기 시장에서 기술 국산화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에스피지의 모기업 격인 모터 제조사 성신은 1990년 일본 모터 회사에 견학을 갔다가 감속기 제조 라인 앞에서 굴욕을 당했다. "한국 기술로는 어차피 못 만든다"는 일본 회사 관계자가 막아선 것이다. 모터와 달리 복잡한 기술이 요구되는 감속기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여 대표는 당시 성신의 연구원이었고, 그 일 이후 일본으로 파견됐다. 여 대표는 "2년간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며 힘겹게 감속기 설계법을 배웠다"고 했다. 내구성 강화를 위한 열처리 기술 등 다른 기술은 독일·스위스에 가서 배웠고, 이 기술들을 바탕으로 1991년 에스피지가 설립됐다.

에스피지는 처음엔 녹즙기나 복사기용 감속기 등 비교적 쉬운 제품을 만들었다. 2002년 냉장고용 얼음 분쇄기에 들어가는 감속기를 내놓으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자신 있다. 와서 써보고 사라"

여 대표가 경영을 맡은 이후 회사는 본격적으로 로봇용 감속기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일반 감속기를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정확한 위치 제어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부품이 좀 더 정밀해야 하고, 강하고 변칙적인 힘을 버티기 위해 강도도 높아야 한다. 2015년부터 약 3년간 연구개발을 진행한 끝에 정밀도 있는 감속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강도였다. 여 대표는 "일본은 한국이 비법을 알까봐 관련 부품을 팔지도 않을 정도로 견제했지만, 1년여간의 시행착오 끝에 특수합금강 소재로 부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여 대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몰라주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중국 가전 대기업은 회장이 직접 찾아와 저녁에 마오타이를 대접하는데 한국 대기업은 부장도 만나기 어렵다"며 "그동안 국내 대기업이 시장에서 검증이 된 일본 부품을 선호했던 측면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 대표는 "로봇용 감속기를 일본 제품 70% 가격에 똑같은 성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못 믿겠으면 와서 써보라. 그리고 괜찮으면 사라"고 말했다.




인천=김충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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