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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겁났으나, 그들 풍찬노숙하는데 연락 끊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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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한일 ‘민주화 연대’ 비밀편지

민주화운동 막후 조율사 김정남

한국계 단체 한민통 핵심 인물인

배동호와 70~80년대 밀서 교환

서로 얼굴 모른 채 가명만 사용

박정희 정권 때 ‘민주구국헌장’ 운동

일본 포함 국외 서명운동 추진 등

민주화 투쟁 국내외에서 긴밀 협력

87년 6월항쟁 시기 정보 교환 활발

무위당 장일순도 서신 교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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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전, 사회의 진보는 많은 힘이 모아져야 가능하다. 한국의 민주화도 그랬다. 국내의 여러 세력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힘을 보탰다. 일본의 한국계 민주화 세력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현 한통련)의 투쟁을 비롯한 일본 양심 세력의 지원 활동이 그 하나다. 한민통의 민주화운동은 국내와의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져온 것으로 알려졌었다. 1970년대 말부터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낙인이 찍힌 한민통과 국내 인사들이 교류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국 민주화운동 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정남씨와 한민통의 핵심 간부인 배동호씨가 1970년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비밀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확인됐다. 이들의 교류는 국내외 양심 세력의 연대와 협력이라는 면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또 한국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돼왔던 한민통을 민주화 세력이 내적으론 포용하고 있었다는 점도 보여준다.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4년 전 <조국이 버린 사람들>(저자 김효순)에 살짝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자세한 편지 내용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가톨릭과 일본 가톨릭의 비밀통로를 통해 오간 민주화 밀서를 들여다본다. 김정남씨와는 두차례 인터뷰(9월2일과 9일) 했다.



“조지 선생께…

제가 보기로 현재의 최대의 쟁점과 공격무기는 박종철군의 고문살인 사건의 조작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범을 빼고 공범을 배제한 것이지만, 그러나 범인 조작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해외에서도 최대의 이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사실 선생님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통일민주당이 오물들을 털어버리고 민주 세력의 구심체로 출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희망일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일그러져나갈지 몰라 하루하루가 불안한 형편입니다. 이번 조직책 인선 문제에 있어서도 기계적 반분이 아니라 그 기준을 가급적 지키되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의 결정 원칙과 상호신뢰의 원칙을 영(김영삼)과 중(김대중) 사이에 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 양김씨의 관계도 언제 어떻게 비끄러질지 우려스럽기 한량없습니다. (하략)

5월21일 밤 마리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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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조지’ 가명 사용

1987년 6월항쟁 직전 서울의 마리아(Maria)는 도쿄의 조지(George)에게 비밀편지를 썼다. 며칠 전(5월18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2003년 작고)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를 발표한 직후였다. 마리아는 조지에게 고문치사 조작에 대한 해외의 지원투쟁을 요청했다.

그해 1월 초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뒤 국내에서는 연일 반정부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박군에 대한 고문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사실이 사제단의 폭로로 밝혀진 뒤에는 국민들의 분노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 코너로 몰릴 때였다. 마침 제도 정치권에서도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선명 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87년 4월)해 재야 민주화 세력과 함께 직선제 개헌 투쟁을 힘차게 벌이고 있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힘을 합친 두 계파가 대립과 분열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편지에는 그런 내용도 상세히 담겼다.

편지지 14장 분량의 이 편지는 인편으로 며칠 뒤 일본 도쿄에 사는 조지에게 전달됐다. 조지는 40여일 뒤인 그해 7월9일 마리아에게 답신을 보냈다.

“친애하는 마리아 동지께…

우리의 6월투쟁은 민중 승리의 첫걸음을 내어디뎠습니다. 완전 승리를 목전에 두고 노태우에게 투쟁 승리의 노란자위를 빼앗긴 셈이 되고 말았는데 이제 우리는 빼앗긴 노란자위를 되찾는 투쟁이 즉각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략)

‘우리는 민주화된 후라도 일심협력하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한 두 사람이 아직 사태가 고정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대권을 노리며 상호 견제하고 세력 규합에 급급하니 대세를 그르칠 전망이 큽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급한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을 비우라’고 한 추기경의 경고를 받아들이는 듯하더니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면 그와 마찬가지로 양김씨는 국민에게 버림받을 것은 명약관화 아닙니까. 우선 급하게 양김에게 강력한 쐐기를 박아두고 양김을 몰고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략)

87.7.9. 조지”


조지 역시 김영삼-김대중 양김씨의 분열이 현실화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는 7장 분량의 이 편지에서 6월항쟁 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 또는 ‘국민운동본부’)가 “정권과 정당 또는 대권을 전망하는 개인에게 견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자격을 정비했다”며 국본이 양김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조심스레 했다. 그러나 역사는 두 사람의 바람이나 노력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직선제 개헌 뒤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는 1987년 말 대선에 따로 출마해 민주진영에 패배를 안겼고, 그 결과 6월항쟁의 노른자위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의 차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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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재야 민주화운동가였던 김정남(77)이다. 1970년대 이후 오랜 수배생활을 하면서 막후에서 각종 민주화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으며, 주요한 민주화 투쟁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계기가 됐던 원주의 지학순(1993년 작고) 주교 구속 사건(1974년), 인민혁명당(인혁당)에 대한 조작을 폭로했다가 구속된 김지하 시인 사건(1975년) 등을 국민적 이슈로 확산시킨 게 대표적이다. 특히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때의 활약상(설경구 분)은 2017년 12월 개봉한 영화 <1987>에서도 자세히 그려졌다.

한국 민주화운동 진영의 막후 조율사 김정남이 편지를 쓴 상대인 조지는 재일 한국인들의 사회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간부 배동호(1989년 작고)였다.

191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와세다대 법대를 중퇴한 그는 해방 후 자주독립국가 건설 투쟁을 벌이다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1948년)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 사무총장과 부단장 등을 지내며 재일동포 지위 향상에 앞장섰다. 그러나 민단이 이승만 및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는 데 반발해 1973년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등 민단 개혁파와 함께 한민통을 만들었다. 배동호는 출범 초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1983년에는 의장이 됐다. 김대중도 창립에 참여했던 한국계 사회단체인 한민통은 출발부터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며, 1978년에는 아무런 근거나 맥락도 없이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의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려 반국가단체로 규정됐다.

지금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정보 교환이지만, 당시에는 자칫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위험한 통신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일파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명목이 바로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의 수괴(김대중은 1973년 8월 한민통 의장을 맡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결성 직전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는 바람에 취임하지 못함)였다는 혐의였다. 따라서 한민통과 연락하는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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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송영순씨가 편지 보관

“적발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늘 겁이 났어요. 그러나 편지 교환을 그만하자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배 선생님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는데 저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 그만하자고 할 수는 없죠.”(김정남, <한겨레> 인터뷰>)

두 사람의 비밀편지가 오가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한창이던 1975년께부터라고 김정남은 기억한다. 한국 천주교와 일본 천주교의 비밀채널이었던 송영순(2004년 작고)이 전달 창구였다. 재일동포인 송영순은 일본 천주교의 정의평화협의회 간사로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원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지학순 주교를 여러 핑계를 대 1974년에 구속했어요. 이를 계기로 한국 가톨릭이 독재 반대 등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죠. 그때 일본 가톨릭이 한국 가톨릭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고요. 그런데 정권의 언론 통제가 심할 때여서 천주교 쪽 움직임 등 국내의 민주화운동 소식을 알릴 길이 외신밖에 없을 때였어요. 마침 송영순 채널을 통해 그런 소식을 일본 등 외국 언론에 알리는 일을 제가 담당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송영순 선생이 보내온 편지 중에 조지라는 가명 편지가 들어 있었어요.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하고 싶어서 송영순 선생한테 부탁한 게 아닌가 싶어요. 내용이 워낙 정중하고 진실해서 제가 답변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것이 첫 시작이었어요.”(김정남, <한겨레> 인터뷰)

배동호씨 한국 사회 이해 깊어
양김 분열·학생운동 과격화 우려

김정남 “발각되면 죽을 수 있으나
정중한 연대 요청 외면 못해”


1989년 배동호의 사망으로 편지 왕래가 끊어질 때까지 둘은 한번도 서로 실명은커녕 성씨도 밝히지 않았다.

“누군지는 처음부터 어렴풋이 알았어요. 송 선생이 대략 말해줬죠. 배 선생님도 저에 대해서 꽤 아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도 서로 모른 척했죠. 혹시 편지가 적발되더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죠. 비밀스럽게 하다 보니까 배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그게 안타깝고, 편지에서조차 배 선생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게 아쉬워요.”(김정남, <한겨레> 인터뷰)

배동호도 김정남의 존재는커녕 한국 민주화 진영의 인사와 서신을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전혀 알리지 않았다.

“저를 비롯한 한통련(1989년 한민통의 명칭 변경)의 2세대뿐 아니라 배동호 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1세대까지도 두 사람의 교류를 알지 못했어요. 몇년 전에 출간된 김효순씨 책(<조국이 버린 사람들>)에서 그런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송영순 선생의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편지가 드러날 경우에 한국 민주화 진영에 불어닥칠 공안몰이 피해를 우려해서 철저하게 함구하신 것 같아요.”(손형근 한통련 의장, <한겨레> 9월18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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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드나드는 가톨릭 신부나 수녀, 수도사 등이 밀서 배달부였다. 여성 속옷에 숨기기 쉽도록 얇은 한지나 미농지에 쓴 게 많다. 서울의 김정남은 보안을 위해 읽은 편지를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송영순은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도쿄에 있는 송영순의 아들 정빈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아버지는 김정남 선생한테 편지가 오면 저를 문방구에 복사 심부름을 시켰어요. 그중 한부를 보관했지요”라고 말했다. 송영순이 작고한 뒤 정빈은 캐비닛에서 나온 한국 관련 자료 전부(10상자)를 김정남에게 보냈다. 편지 200여통은 따로 보냈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중 김정남이 배동호에게 쓴 편지는 20통 정도다.

두 사람의 밀서는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민주화 연대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 이쪽에서는 박종철군 죽음을 중심으로 해외동포운동과 국제운동을 광범하게 조직 전개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의 집회 시위, 삐라(유인물) 살포 등 광범위한 투쟁과 함께 국제운동을 폭넓게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뉴욕 타임스> <르몽드>지에 한국의 인권 현실을 고하는 광고를 내도록 하고(르몽드는 20일자로 이미 발표), 일본 신문에는 전면광고를 교섭 중에 있습니다. 상당한 국제 여론을 환기할 것을 확신합니다. …”(배동호의 편지. 1987년 2월23일)

1987년 1월 초 박종철의 죽음 뒤 전두환 정권은 물고문했던 하급 경찰관 2명만 급히 구속하는 등 사건을 봉합하려고 했지만, 국내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삼엄한 봉쇄 속에도 2월7일 ‘고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대회’가 전국 여러곳에서 진행됐으며, 다음달 3일에는 ‘3·3 고문 추방 국민평화대행진’이 예정돼 있던 때였다. 국내의 투쟁과 발맞춰 일본에서도 2월7일 배동호 한민통 의장이 한국계 다른 4개 단체 대표와 함께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도쿄 우에노역 앞 등지에서 시민들에게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집회를 열었다.

앞서 1977년 3월 윤보선, 지학순, 박형규 등 재야 인사 10명이 발표한 ‘민주구국헌장’도 한·일 민주연대의 대표적 사례다. 김정남이 기획한 민주구국헌장은 국내에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에서는 한민통이 중심이 돼 광범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까지 퍼졌다.

일본 쪽의 성금 부담스러워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1970년 11월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노동열사 전태일의 정신 계승사업도 한·일 시민사회 연대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조영래(1990년 작고)는 장기표가 수집해놓은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해서 전태일 평전을 1976년에 완성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출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원고는 김정남을 거쳐 일본의 송영순에게 보내졌고, 1978년 <불꽃이여 나를 둘러싸라>라는 제목으로 일본어판(한국에서는 1983년 출간)이 먼저 나왔다. 한민통은 이를 영화(<어머니>)로 만들어 78년 11월부터 일본 전역에서 상영했다. 영화는 일본 시민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한민통 쪽은 영화 상영 수입금 등을 이소선 여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 귀회가 모금해서 보내주신 1000$을 잘 받았습니다. 그 1000$은 내가 가장 소망하고 있는 노동교실 마련에 소중하게 쓰여질 것입니다. … 1978.12.21. 전태일 모 이소선”

이 편지는 이소선 여사가 ‘대한부인회’(민단 소속이었다가 한민통으로 적을 옮긴 재일 한인 여성단체, 현재는 ‘재일한국민주여성회’) 앞으로 보낸 감사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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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일본 천주교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이처럼 한국 민주화운동을 돕는 차원에서 성금을 가끔 보냈다. 그때마다 김정남은 돈이 틀림없이 잘 사용됐음을 확인하는 내용의 편지를 일본에 전달했다. 1977년 겨울 송영순을 통해 “연료”(성금) 50만원이 김정남에게 건네졌다. 일본 천주교 쪽이 마련한 돈으로 보인다. 이 돈을 김정남은 옥중에 있는 양심수 100명에 대한 영치금으로 썼다.

“작년 말 다니엘이 돈이 없어 10만원을 가지고 각각 쪼개서 사과와 계란이나 사 넣으려고 했던 차에 그 연료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50만원)과 10만원을 합쳐 60만원을 가지고, 전원에게(100명) 5천원씩 영치시키고, 담요(한장에 9천원) 6장, 강종헌에게 3만원 따로 떼 놓고, 기타 경비를 썼으며, 요긴하게 크리스마스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또 다니엘 이름으로 그때 일괄해서 넣을 수 있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남의 돈 가지고 생색 한번 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김정남이 송영순에게 보낸 편지. 1978.1.)

다니엘은 지학순 주교의 세례명이다. 강종헌, 이철, 최철교, 유영수 등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전원이 재심 무죄 판결)들에게 넣은 영치금 차입 영수증을 송영순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했다. 그러나 김정남은 송영순과 배동호가 가끔 보내오는 성금은 운동의 자주정신에 맞지 않는다며 여러번 사양했다.

“… 말씀드리기가 참으로 죄송하오나 자료(성금을 일컫는 말)가 제게 크게 부담이 됩니다. 그러지 않아도 꾸려갈 수 있사오며, 자칫 자료 같은 것이 있으면 오히려 더 나태, 자만, 안일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립, 자주의 정신에도 크게 어긋나오니, 거듭 간곡한 말씀으로 더불어 바라옵건대, 더 이상의 배려 없으시기 바라옵니다. …”(배동호에게 보낸 김정남 편지. 198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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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김정남 선생 용기가 대단”

배동호의 편지에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한민통 쪽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양김씨의 분열을 걱정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계의 힘을 모으는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권의 노선 투쟁이 심해지고 과격화하는 데 대해서도 우려했다. 당시 한국 민주화운동 진영과 같은 시각이었다.

“청년 학생들의 투쟁에서 반미 반전 반핵 구호가 터져 나오는 것은 투쟁 발전의 추이로 보아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투쟁조직으로 ‘민민투’ ‘자민투’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강 건너의 관찰만으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학생투쟁은 먼저 학생 대중의 지지와 동참을 받는 것이 첫째 조건이고 나아가서 사회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배동호 편지. 1986.5.15.)

민주화투쟁 목표나 방법 등에 대한 이러한 공감대야말로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신을 교환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두 사람의 신뢰가 쌓이자, 배동호는 1980년대 후반 김정남을 통해 원주의 재야 지도자 무위당 장일순(1994년 작고)과도 몇차례 서신 교환을 했다. 김정남은 배동호 장례식 때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써 보내기도 했다.

“배 선생은 늘 아주 정중하고 사려가 깊었어요. 국제적인 감각도 뛰어났고요. 그런 분이 이끄는 단체를 과거 독재정권에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만들었는데 2기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까지 그 굴레를 벗겨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참 답답해요. 김대중 정부에서 벌써 풀었어야 했어요. 이제는 제발 빨갱이니 뭐니 하는 이분법을 떨쳐버려야 합니다.”(김정남, <한겨레> 인터뷰)

두 사람의 서신 교환 사실에 학계도 놀라고 있다. 한국현대사 전문가인 한홍구 교수(성공회대)의 말이다.

“한통련(한민통)은 지금도 한국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어요. 한국의 운동권조차 독재정권이 만든 굴레를 못 벗어났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절에 한국 민주진영의 대표적인 인사가 한민통 핵심 간부와 교류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일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국제 연대라는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죠. 제대로 된 평가가 나와야 합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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