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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살아있음 확인하려고 뇌 수술 이틀 뒤부터 글 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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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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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사우).

1998년부터 정치평론가란 직함으로 살아온 유창선 박사가 최근 낸 책이다. 그는 지난 2월 서울대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하고 지금껏 재활 치료 중이다. 수술은 잘 됐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수차례 폐렴을 앓았고 혈압조절이 안 돼 앉기만 해도 실신했다. 지금도 음식물 섭취는 튜브로 한다. 뇌 신경 장애로 식도를 여는 괄약근 조절이 되지 않아서다. “최근 보톡스 시술로 식도를 열어 요플레나 곱게 간 죽 정도는 먹어요. 하지만 (보톡스는) 3개월 한시 조처죠. 제대로 삼키려면 뇌 신경이 돌아와야죠.” 2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재활전문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뇌를 열고 두개골을 절개하는 대단히 위험한 수술이었어요. 종양이 중추신경 10개가 지나는 숨골에 붙어 있었죠. 10시간 대수술에 출혈도 심했어요. 호흡곤란, 부정맥 같은 합병증도 심해 서울대병원에 70일 입원하고 재활병원으로 옮겼죠.”

이런 고통에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수술하고 이틀 만에 중환자실에서 병상에 누워 에스앤에스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여전히 서울대병원 입원 환자였던 지난 4월 중순에는 <시사저널>에 정치칼럼 ‘유창선의 시시비비’ 연재를 시작했다. 수술 7개월 만에 나온 이번 책도 병상 식탁에 노트북을 펴놓고 틈틈이 쓴 글을 모았다. “<시사저널> 첫 칼럼은 누워서 휴대폰을 붙잡고 썼어요. 폰에 워드 앱을 깔아 한자씩 써내려갔죠.”

뇌 신경 회복을 고대하며 재활 중인 환자에게 정치칼럼 집필은 너무 고된 일 아닐까? “병상 글쓰기는 많이 불편해요. 집중도 어렵고 밥상을 펴고 글을 써야 하니 허리도 아프죠.” 그런데 왜? “지난 몇 개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목숨을 건졌죠. 살아있다는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병마 앞에 무기력하게 포로가 되는 것보다 나의 것을 놓지 않고 생활하는 게 바로 나의 힘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존감을 지키려는 마음이죠.”

그는 98년 방송을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잘 나갈 때는 하루에 티브이·라디오 다섯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단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작심하고 3년 동안 동네 독서실에서 인문학 공부에 몰두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하루아침에 방송이 다 끊겼어요. 그렇게 5년이 흘러 박근혜 정부가 됐죠. 5년이 10년이 된 거죠. 그때 생각했어요. ‘내 운명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가, 내가 내 삶을 결정해야 하는데 외부에서 나의 삶을 흔들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삶을 개척하는 나의 힘을 키우자는 생각에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인문학책도 내고 강의도 했죠.”

지난 2월 뇌종양 10시간 대수술
수술 잘 됐으나 실신 등 후유증
지금도 음식물 제대로 못 삼켜
뇌 신경 회복 재활 중에도 글쓰기
정치칼럼 재개 이어 에세이집도


“내 본성 앞에서 정직한 삶 살 터”

그는 최근 낸 책에서 “이제 큰 삶이 아니라 작은 삶, 무거운 삶이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삶을 살고 싶다”고 썼다. “건강할 때도 인문학 공부를 하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그 생각이 선명해졌죠. 이제부턴 내 본성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고 싶어요. 그동안 행복하고 싶은 내 본성을 억압하는 무거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해요. 수술하며 생에 대해 많이 겸손해졌죠. 순식간에 죽을 수 있는 게 바로 나이더군요. 자연과 생명의 순리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욕심을 많이 부렸어요. 나의 정의로움을 인정받겠다는 욕망이 강했죠.”

한겨레

‘이 땅 위에는 너무나 많은 가난과 비탄과 어려움과 끔찍한 일들이 가득해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 책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저자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최인훈 소설 <회색인>에서 김학은 혁명을, 독고준은 사랑과 시간을 말합니다. 다시 사는 삶의 기회를 얻은 저에게 지금 뭘 택하겠느냐고 물으면 사랑이라고 할 겁니다. 지금도 넓은 의미에서 혁명을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혁명은 시간이 지나면 길을 잃어요. 하지만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발을 담고 있는 정치평론의 세계는 “굉장히 험하다.” “어떻게 내 얼굴을 지켜내면서 정치평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죠.” 덧붙였다. “방송에 나가면 피디가 패널들을 이편저편 나눕니다. 편을 갈라 싸우라는 거죠. 거기 맞추면 자기를 지킬 수 없어요. 그게 답답했어요. 방송은 자극적인 것을 원하죠. 그 틈바구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아요.” 평론가가 특정 진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자유의 박탈’이라고도 했다. “진영에 속하면 자기 진영의 문제는 성찰하지 않고 지나갈 수밖에 없죠.”

그도 현실정치 경험이 있다. “운동권 서적 출판으로 몇 개월 구치소 생활을 하다 풀려난 뒤였죠. 92년 재야에서 ‘꼬마민주당’에 합류해, 디제이와 이기택씨가 만든 통합민주당에서 기획조정실 전문위원을 했죠. 이부영 의원 보좌관도 했고요.” 만 41살이던 2001년 모교인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지역주의 정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저는 정치를 즐겁게 할 사람이 아니더군요. 정치하려면 혐오스러운 상대랑 변죽 좋게 형님·아우 해야 합니다. 평생 못 보던 사람 상가에 가서 슬퍼해야 하고요. 그게 나의 모습은 아니란 생각을 했죠.”

정치평론가는 미디어에서 정치를 말하는 사람이다. 지난 21년 한국 정치와 미디어의 변화상을 물었다. “국민 뜻에 따라 언제나 정권이 교체되는 등 민주주의가 크게 확장했어요. 안타까운 건 진영논리가 강화해 사회의 다양한 합리적 의견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점이죠. 양자택일 의견만 있어요. 미디어도 많은 기술적 발전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지성의 실종’ 같은 걸 느껴요. 예전 리영희, 송건호 선생 같은 지성의 목소리를 찾기 힘들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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