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칼럼]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비뇨의학과 이승주 교수
대한비뇨의학회는 지난해 60년 만에 ‘비뇨기과’라 불리던 전문과목 명칭을 ‘비뇨의학과’로 변경했다. 남성 질환만 치료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뇨의학과는 남녀노소 모두의 요로계 및 생식계를 담당하는 전문 의학과로, 성 매개 감염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성 매개 감염은 최근 개방된 성문화·성인식의 변화 등으로 인해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성 매개 감염 질환 중 생식기 사마귀나 남성 생식기암, 여성 자궁경부암 등을 일으키는 HPV 감염은 다행히 70~90% 이상 예방이 가능하다. 예방백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백신은 매우 안전하며 남녀 모두 접종이 가능하다. HPV 감염은 생식기 사마귀를 제외하고는 증상이 없기 때문에 본인의 감염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파트너와 성관계를 갖게 되며, 이때 파트너를 전염시킨다. 아직 치료제가 없기 때문에 백신을 통한 예방만이 최선의 대응법이다.
HPV 백신은 우리나라에 ‘자궁경부암 백신’이란 이름으로 처음 소개돼 마치 여성 질환의 예방만을 위한 백신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HPV 감염은 남녀에게 공통된 것이고 성 접촉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남녀 모두 예방해야 한다. 정부는 2016년부터 만 12세 여아만을 대상으로 HPV 백신 국가예방접종 지원사업을 시작하고 있어 남자 청소년의 성 건강 및 인식 제고를 위한 정책적 공백에 아쉬움이 있다. HPV 백신에 국가필수예방접종 프로그램을 도입한 총 89개국 중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27개국에선 남아에게도 HPV 백신을 지원하고 있다. 가장 먼저 HPV 백신을 도입한 호주는 2013년에 남자 청소년의 HPV 백신 접종을 포함한 결과 2034년에 자궁경부암을 가장 먼저 퇴치한 국가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미국국립암연구소(NCI) 지정 암센터는 HPV와 관련된 암과 질환을 퇴치하자는 목표를 발표하면서 내년까지 13~15세 여성과 남성의 80% 이상이 HPV 예방접종을 받도록 하는 것을 행동강령의 하나로 내놓았다.
우리나라도 정책적 공백을 보완하고, 성 매개 감염에 대한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국내 지자체에서도 청소년기 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성 지식 전달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점은 고무적이다. 최근 필자는 동대문구청 및 서울대 보건대학 등과 협력을 통해 관할 지역의 남자 중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성 지식 전달을 위한 교육에 참여했다. 낯을 가리던 학생들이 본격적인 질문 시간이 되자 생기가 돌았다. 이 중에는 잘못된 의학적 내용으로 우려할 정도의 정보도 있었고 남학생들의 말 못 할 고민도 있었다. 그동안 아이들의 커져 버린 호기심 앞에 ‘안돼’ ‘하지 마’ 같은 성교육이 되레 성 건강을 해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의 성 건강 안전지대를 더욱 넓히기 위해 앞으로는 성교육을 넘어서 성 건강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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