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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혀 지나 머리끝까지 치고 오르는 단맛… 연인 키스처럼 스르르 눈감기는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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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티라미수편

서울 신사동 '있을재'

조선일보

서울 신사동 ‘있을재’의 티라미수(앞)와 과일 타르트.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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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미수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디저트다. '이탈리아적'을 정의하려면 '한국적'인 것과 비슷하게 많은 용기와 무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코코아 파우더, 에스프레소 커피, 마스카포네 크림치즈로 만드는 이 디저트는 흔히 생각하는 이탈리아적 요소가 듬뿍 들어가 있다고 조금은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우선 공정이 복잡하지 않다. 밑바닥에 에스프레소를 적신 스펀지 케이크를 깔고(전통을 따른다면 길쭉한 '사보이아르디 쿠키') 달걀 노른자, 마스카포네, 설탕 등을 섞어 그 위에 올린 뒤 코코아 파우더를 뿌리면 간단히 완성된다. 또한 (무조건) 좋은 재료, 그것도 그 지역에서 난 것을 써야 한다. 요리사에게 필요한 것은 근방에서 난 좋은 재료를 알아보고 구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 혹은 의지다. 재료의 맛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접시 위에 구현하는 기술은 그 뒤다. 실상 어느 요리를 하든지 필요한 덕목이다. 유독 이탈리아인의 목소리가 이 부분에서 크고 웅변적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청담동 '우나스'는 이탈리아적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기술과 시간이 적지 않게 쓰였다는 뜻이다. 디저트 전문점답게 티라미수 말고도 그림에서 뛰쳐나온 듯한 디저트가 진열장에 놓여 있다. 크림에 공기를 넣어 가볍게 처리한 무스(mousse)류가 많아서 전체적으로 맛이 산뜻하고 무겁지 않다. 호두나 멜론의 모양을 그대로 따서 만든 디저트는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티라미수 역시 생김새부터 평범하지 않다. 에스프레소를 따로 젤리 같은 얇은 젤(gel)로 만들어 케이크 위에 물방울처럼 올려놓았다. 손님이 직접 이 젤을 나이프로 터뜨리면 그제야 커피가 밑으로 스며든다. 바닥에는 스펀지 케이크가 아니라 바삭한 페이스트리를 얇게 구워 깔았다. 이처럼 세밀하게 통제된 여러 요소가 작은 케이크 안에 공작 기계처럼 조합되어 있다. 요리사는 실험실처럼 말끔한 주방에서 1g 단위로 저울을 쓰며 재료의 물성과 화학반응을 공부한다. 밖에서는 입안 가득히 달콤한 것을 넣고 웃음 짓는 손님들이 큰 창 옆에 앉아 가을의 햇살을 받는다.

태양이 아닌 달빛을 받으며 술잔이 울리는 청아한 소리를 듣고 싶다면 신사동 도산공원 부근 '있을재'에 가보자. 재(在)를 돌림자로 쓰는 형제가 각각 주방과 홀에 선 이곳은 신토불이와 같이 각 지방에서 난 고유의 식재료를 써야 한다는 이탈리아 요리의 철학을 실천하는 레스토랑이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이 땅에서 난 식재료 즉 꽈리고추, 멍게, 제주 딱새우 같은 친숙한 이름들이 메뉴판에 올라 있다. 그중 양곱창과 소힘줄찜을 토마토소스에 끓인 '트리빠'는 이탈리아의 기술에 한국의 재료가 작은 이음새도 없이 맞닿아 있는 모범이다. 맛을 보면 익숙한 반가움과 낯선 즐거움이 씨줄과 날줄로 섬세하게 엮여 있다. 홍합, 가리비관자 등이 넉넉히 올라간 '해산물 스파게티'는 허기를 여유롭게 달래고, 큼지막한 '토종닭구이'는 몇 명이 나눠 먹어도 될 정도로 푸짐하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듯한 식사의 끝에는 연인을 만날 때처럼 눈을 지그시 감게 만드는 디저트가 있다. 중국 쓰촨(四川) 요리에 즐겨 사용되는 향신료인 화자오(花椒)를 올린 '과일 타르트'는 단맛과 얼얼하게 매운맛이 장난치듯 밀고 당긴다. 그리고 초콜릿을 갈아 위에 뿌린 '티라미수'가 등장한다. 촘촘한 마스카포네 크림이 머금은 단맛이 혀를 지나 머리끝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간다.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어느 순간 눈을 뜨면 다가와 있는 흥분처럼 서서히 고조되는 쾌감이다. 그 감각은 혀를 지나 머리를 쓰다듬고 손끝에 머문다. 그 여운에 못 이겨 하얀 조각을 숟가락으로 자르듯 떠서 다시 입에 넣는다. 또 눈이 감긴다. 꿈 같은 위안이 가을 바람에 실려 몸에 닿는다.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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