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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태평로] 방위비 금액, 그 밑에 흐르는 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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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 놓고 흥정하는 트럼프

거칠고 천박하지만 미국 자체가 바뀐 게 문제

방위비는 빙산의 일각일 뿐

조선일보

임민혁 논설위원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앞두고 한 전직 외교관이 트럼프 미 대통령 영상을 메신저로 보내왔다. 지난해 백악관에서 열린 미·폴란드 정상회담 기자회견의 일부다. 영상에서 트럼프는 "폴란드에 미군을 영구 주둔시키는 대가로 폴란드 대통령이 20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내겠다고 한다. 우리는 비용 측면에서 이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고, 폴란드 대통령은 "우리는 더 많은 미국 무기 구입을 희망한다"고 받는다. 용병 거래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트럼프의 '돈 타령'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전 세계가 지켜보는 공개 석상에서도 미군을 놓고 이런 흥정을 거리낌 없이 벌인다. 실제로 얼마 전 폴란드 내 6개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는 데 합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영상을 보낸 외교관은 "방위비 협상이 틀어지면 주한미군 철수 같은 일이 현실화되지 말란 법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으로 11번째인 방위비 협상이 쉽게 마무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번 전망은 특히 어둡다. 벌써 '5배 증액 요구' 얘기도 나온다. 미국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방어하기 위해 청와대가 '숫자와 예산에 밝은' 기재부 출신 관료를 처음으로 대표선수로 내세웠지만, 미국은 사실상 트럼프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다. 방위비 협상은 한국에서나 민감한 이슈지, 미국에서는 실무자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이 트럼프가 '동맹의 무임승차 저지'를 대표 브랜드로 들고 나오며 국가적 이슈가 돼버렸다. 그는 내년 대선 유세장에서 "내가 한국에서 ○억달러를 더 받아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든 67년 혈맹(血盟)이 돈 문제로 심하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의 이런 행태에 워싱턴 주류 지식인들은 진저리를 친다. 노골적으로 돈을 앞세워 동맹을 압박하며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전통적 역할을 팽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 주요 언론은 트럼프를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거짓말쟁이(shameless liar)' '폭력적인 깡패(abusive bully)'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트럼프가 탄핵당한다면, 아니면 내년 재선 도전에 실패한다면, 미국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이 모든 게 트럼프 탓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미 미국은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대다수 일반 미국인은 미국이 세계 모든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떠안는 데 대해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다. 공화당·민주당 지지자 구분없이 '동맹 보호에 미국 세금을 쏟아붓지 말고 미국인을 위해 더 써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사명을 지닌 특별한 나라'(미국 예외주의)라는 자부심은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졌다. 오바마 전 대통령조차 퇴임 전 인터뷰에서 일부 동맹을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한 것은 이런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로버트 케이건의 말을 빌리면 "트럼프가 미국을 바꾼 게 아니라 미국이 바뀌었기 때문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바뀐 미국'은 지금보다 훨씬 덜 거칠고 덜 적나라하고 덜 천박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장 이번 협상에서 방위비를 얼마로 타결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여론의 관심도 액수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정부는 숫자 싸움에만 올인하지 말고, 그 뒤에 내포된 미국의 근본적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우리 안보 전략 방향을 잡을 것인가도 고민하길 바란다. 우리는 이미 주한미군, 전략자산, 연합훈련, 확장억지 등 동맹 이슈가 미·북 협상 테이블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미국의 새 민낯 앞에서 방위비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임민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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