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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현실을 소름 끼치게 닮은… 순식간 무대에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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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맨 끝줄 소년’ 리뷰 / ‘아웃사이더’ 제자의 재능 발견한 교사 / 위험한 글쓰기 부추기며 긴장감 유발 / 탁월한 연출… 배우들은 빈틈없는 연기 / 막이 내린 후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해

세계일보

‘맨 끝줄 소년’은 누구인가. 늘 자신을 감춘 채 모두를 볼 수 있는 교실 맨 끝자리에 앉는 ‘클라우디오’다. “수학을 잘하나 철학은 못한다”는데 논리가 부족하다기보다 정서가 결핍된 소년이다.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눈빛에선 메마른 감정만 느껴진다.

누구하고도 소통하지 않던 ‘앗싸(아웃사이더)’ 클라우디오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문학 수업 시간이다. 영상의 시대, 문학에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 학생들에게 환멸을 느껴온 문학 교사 ‘헤르만’이 ‘지난 주말’을 주제로 낸 글짓기에 클라우디오는 도발적이나 소설 첫 장으로 충분한 작문을 제출한다. 같은 반 친구네 집을 일부러 방문해 서늘한 시선으로 관찰한 내용이 당돌하다. 친구 엄마를 ‘권태로운 중년 부인’운운하며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면도날로 해부하듯 글로 묘사했다.

항상 학생 과제를 미술관 큐레이터인 부인 ‘후아나’와 함께 읽어온 헤르만은 클라우디오 글에서 자신이 갈망했으나 갖지 못했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다. 연재소설처럼 ‘다음 편에’로 끝맺는 클라우디오의 라파 가족 관찰기에 중독된다. 그는 매혹된 나머지 클라우디오에게 “독자에게 쉴 틈을 줘서는 안 돼. 긴장을 유지해야 해”, “제목은 독자와 계약을 맺는 거야. 무엇에 가치를 두어 야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독자에게 방향을 주는 거지”, “모든 등장인물은 서로 꼭 필요한 존재여야 해”라며 위험한 소설작법 교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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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맨 끝줄 소년’에서 제자 클라우디오(전박찬)에게서 재능을 발견한 문학선생 헤르만(박윤희)이 글쓰기의 요체를 가르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예술의전당 기획 연극으로 2015, 2017년에 이어 세 번째 무대가 만들어진 ‘맨 끝줄 소년’은 원작자인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위대한 연극, 가장 좋은 연극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평소 지론처럼 막이 내린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탁월한 연출과 열연은 흡인력 강한 무대를 만들었다.

‘위험한 글쓰기’라는 아내 지적에도 불구하고 문학선생이 “글은 본 것을 토대로 써 내려간 가짜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며 긴장과 갈등, 극적 사건을 주문하면서 클라우디오는 친구 ‘라파’ 가족의 관찰자에서 행위자로 변화한다. 부부침실까지 침입한 소년은 결국 무기력한 삶에 지쳐있던 친구 엄마 마음을 자극하는 시를 쪽지에 적어 바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모든 전개는 초연 때부터 격찬을 받은 작품 특유의 무대와 형식 내에서 이뤄진다. 헤르만이 무대 오른편 자신의 책상에서 클라우디오에게서 건네받은 글을 읽으면 그 속에 담긴 라파네 집에서 벌어진 일이 왼편 무대에서 재연되는 방식이다. 무대 주조명은 라파네 집으로 이동하지만 헤르만의 탁상등은 어둠 속에서 계속 빛을 발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어디까지나 글 속 내용인 만큼 사실인지 허구인지 불명확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무대 세 면을 둘러싼 유리벽은 때로는 클라우디오가 대화를 엿듣는 복도, 때로는 헤르만 아내가 운영하는 갤러리 벽이 된다. 음악은 남녀 2인조 코러스가 맡아 극적 순간마다 적절히 구음과 스캣으로 주의를 환기하고 긴장을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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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맨 끝줄 소년’에서 주인공 클라우디오(왼쪽에서 두번째)가 객석을 향해 등 돌리고 앉아 전형적 중산층 가정인 급우 ‘라파’네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클라우디오 역은 초연 때 ‘배역 일치율 100%’라는 평가를 받으며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클라우디오를 열연해 찬사를 받은 전박찬과, 영화와 연극무대를 오가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는 안창현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맡고 있다. 또 초연부터 문학선생 헤르만 역으로 참여하고 있는 박윤희 배우, 라파의 어머니 ‘에스테르’ 역의 김현영 배우와 2017년 재공연 때 합류한 후아나 역의 우미화 배우가 선보이는 빈틈없는 연기 조화가 작품의 완성도를 더한다.

지난달 30일 공연에선 전박찬과 박윤희가 절정의 호흡을 보여줬다. 특히 전박찬이 특유의 눈빛으로 객석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좋은 연극은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작가 바람대로 이 작품은 보는 이마다 다양한 해석과 감상이 가능하다.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의 본질을 묻는 연극이라지만 무대가 객석 중간 계단으로 확장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전박찬의 눈물 연기는 불우한 소년이 위험한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세상과 교감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손원정 연출은 “맨 끝줄 소년에서 벌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보고, 쓰고 , 읽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보면서 엄청난 몰입감과 함께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거꾸로 단순한 보기와 쓰기와 읽기, 즉 예술 만들기와 예술 보기가 본질적으로 지닌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드러낸다”며 “예술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에, 그러나 현실을 소름 끼치게 닮은 허구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밀착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12월 1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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