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47)
세상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인공물이던 자연물이던 사물은 모두 각자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들의 침묵조차도 외침의 일종이다.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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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있는 우산
궂은비 오는 날엔
주름 접힌 하늘을 펴고
그대의 실루엣과 걷는다
표정이 있는 우산들
경계의 끝자락에 매달린 빗방울엔
옷고름을 푼 구름의 속살을 담고
달빛이 벗어 놓고 간 투명한 얼굴을 비친다
뭇소리는 모두 빗소리에 묻히고
나뭇잎 무성한 숲이 아니더라도
싱싱한 물방울 무리 지어 날아간다
비 오시는 날엔
앞지르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왼 어깨 오른 어깨를 적시며
먼 길을 마냥 걸을 수 있다
■ 해설
세상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인공물이든 자연물이든 사물은 모두 각자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들의 침묵조차도 외침의 일종이다. 듣고 싶어 할 땐 여지없이 울림을 보낸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사물의 속삭임이 대개 우리 마음을 대변한다는 거다.
육조 혜능조사가 10여 년 은둔생활을 끝내고 나와 첫 가르침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선문답이었다. 어느 절에서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깃발이 흔들린다”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흔들린다”고 맞섰다. 육조 스님이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 마음이 흔들린 것일 뿐.”
간혹 사람들이 쓴 글을 읽다 보면 ‘병아리 떼가 바쁘게 움직이며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다’는 표현을 만난다. 따지고 보면 병아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들의 생활 리듬은 본래 그대로인데 그걸 지켜본 사람의 마음이 바빠 본질을 살펴보지 못해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참새나 병아리처럼 작은 체구의 동물들은 동작이 잽싸 보일 뿐이다. 그런 게 자연스러운 평소 행동이다. 또 몸집이 큰 동물은 천천히 움직이는 게 안전하기에 우리 눈엔 얼핏 게으르게 보일 수 있다.
대상의 본래 언어를 읽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짐작하여 해석하는 것이 꼭 나쁘거나 잘못된 건 아니다. 사실 인간이 영위하는 미술이나 음악, 시 등 대부분 예술이 그런 착각을 통해 탄생한다. 다만 얼마나 상투적이지 않고 독창적이며 공감을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인간의 정보 욕구는 90% 시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떤 장면을 손쉽게 담을 수 있다는 게 스마트폰 최대의 장점이 되었다. 이젠 남녀노소 누구나 사진을 찍는 유희본능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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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고유 언어에 인간이 느끼는 감각을 재해석하여 덧붙이는 행위가 현대에 와서 디자인이란 분야가 되었다. 예술이 대상의 언어를 발견해 재해석해준다면 디자인은 그 언어에 반응하여 형태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물건의 실용성과 상징성 그리고 이끌리는 유혹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에게 필수품이 된 이유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인간본능을 해치지 않고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적당히 차단되고 독립해 지내고 싶다는 욕망이 합쳐져 그렇게 되었다. 거기다 한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는 페티시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언가 만지고 싶고 소유하고픈 욕망이 페티시다. 그래서 잠시라도 떨어지면 허전한 느낌이 드는가 보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급성장한 이유는 카메라와의 만남에 있다. 인간의 정보 욕구는 90% 시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떤 장면을 손쉽게 담을 수 있다는 게 스마트폰 최대의 장점이 되었다. 이젠 남녀노소 누구나 사진을 찍는 유희본능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셔터가 없기에 찰칵하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맞다. 그럼에도 찰칵하는 효과음을 넣는 이유는 사진을 완성하였다는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착각이 주는 효과를 디자인한 것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잘 찍으려면 찰칵 소리에 신경 쓸 게 아니라 조심히 손을 떼면서 화면이 움직이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손을 뗄 때 사진이 찍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별을 잘 해야 멋진 그림을 건질 수 있다.
이런 게 사물을 허투루 보지 않고 대상과 잘 소통하는 방법이다. 물건의 언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와 소통하는 게 최선이다. 디자이너가 인간이 아닐 때도 있다. 자연이 디자이너일 때도 있다.
가끔은 자연의 디자이너가 의도한 뜻을 거슬러 자기 편의에 따라 성급하게 대하곤 한다. 그런 사례 중 가장 큰 피해가 어린아이의 교육이다. 아이들은 대개 자신의 리듬에 따라 상황에 적응하며 자란다. 밥을 먹는 일만 해도 그렇다. 손놀림이 정확하고 익숙하지 않아 밥을 온 사방에 흘리며 먹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그런 아이 동작을 지켜보다가도 바쁜 일이 생기거나 마음에 혼란스러운 일 생기면 엄마는 급변한다. 숟가락을 빼앗아 직접 떠먹이거나 심지어 야단을 치고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그럼 아이는 겁에 질려 더욱 행동이 굼떠지고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해 나아가 자기 의사 표현을 못 하게 된다. 마음이 바쁜 엄마만 남게 된 셈이다.
우산이 단순히 궂은비를 맞지 않게 하는 물건일 뿐일까. 현관 수납장 구석에서 온몸이 꽁꽁 접혀 있다가 비가 오는 날에야 비로소 늑골과 같은 우산살을 편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우산에 갖가지 언어를 부여해 놓았다. 손잡이를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누군가와 손잡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부드럽고 둥글게 말아 페티시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외피를 투명하게 만들어 타인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엿보기 심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하늘처럼 둥글게 제작하거나 오두막처럼 만들기도 한다.
우산의 참맛은 아마도 누군가와 함께 쓰는 데 있겠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모를 때 함께 쓰자며 다가오는 우산을 만나면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작은 우산이라 한쪽 어깨가 비에 젖을 게 틀림없는 데도 곁을 양보하는 진심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런 우산 속에는 별 그림이라도 붙어 있을 것만 같다.
우리말에는 존댓말이 있다. 존댓말을 들으면 누구나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새 잘못된 존댓말 사용으로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용서된다. 사물에는 존댓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쓸데없이 붙여서 지적을 당한다. 특히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자주 이상한 존댓말로 곤혹을 느낀다.
사물에도 존댓말을 쓸 데가 있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비와 같은 자연현상에는 써도 된다. 비가 오는 것과 오시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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