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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66쪽 중 18쪽 없는 '훈민정음 상주본'의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결정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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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서문 포함)는 전해졌지만 한글의 창제원리가 적힌 ‘해례’의 존재를 몰랐다가 이 해례본이 출현함으로써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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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나왔을 때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는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셨다”면서 감격했다.

외솔은 왜 그렇게 환호했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원본 혹은 간송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쓴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한문글이다. ‘해례’는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맨 뒤에 실린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1396~1478)의 ‘서문’은 ‘해례’의 서문이다.

■‘화장실 창살론’을 변파한 해례본 출현

<해례본>은 1940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해례본>의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훈민정음 언해본>은 존재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만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일제는 1930년대 말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하고(1938년), 창씨개명과 종합일간지 폐간을 강행(1940년)하는 등 한글말살 정책을 폈다. 언어가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 즉 세계관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언해본>까지 허구로 몰아붙인 일제로서는 해례본마저 없다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세종의 한글창제 쾌거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었다.

즉 당대 ‘화장실 창살론’까지 등장했으니,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세종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해례본>이 현현했으니 외솔이 뛸 듯이 기뻐한 것이다. 우리 말과 글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말살하겠다고 나선 일제강점기하는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글 반포(1446년) 후 494년만에 현현했으니 얼마나 극적인 일인가.


■한글창제의 오묘한 뜻

한글의 해설서인 <해례본>은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왜냐. 세종대왕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창제했고,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1396~1478)의 언급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문자를 해설하는데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되겠는가.

하지만 당대 최고의 철학을 담고 있는 <해례본>의 뜻은 오묘하고도 심오하다.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가 합해서 이뤄지는 글자는 하늘(첫소리), 사람(가운뎃소리), 땅(끝소리)의 조화라 했다. 첫소리에는 피어나고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일이며, 끝소리는 그치고 정해지는 뜻이 있으니 땅의 일이고, 가운뎃소리는 첫소리가 생겨나서 끝소리가 이뤄지는 것을 이어주니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음절의 핵심은 가운뎃소리에 있는데, 첫소리·끝소리와 합해 소리(음절)을 이루니 역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고 그것을 잘 조절해서 깁고 돕는 것은 반드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의 경우 첫소리를 다시 끝소리로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즉 사계절의 운행은 돌고 돈다. 첫소리가 다시 끝소리가 되고 끝소리가 다시 첫소리가 되는 것은 우주와 자연의 이치이다. 훈민정음, 즉 한글의 창제원리가 이렇듯 심오한데, 어디다대고 ‘화장실 창살’ 운운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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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총 66쪽 가운데 18쪽이 없어서 ‘불완전한 진본’이라 평가된다. 66쪽 중 4쪽이 없는 <간송본>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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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한글 창제의 원리와 의미를 담은 ‘해례’, 즉 해설이 담긴 <해례본>이 현현했으니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셨다”고 외친 것이다. 한글 반포(1446년) 후 무려 494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출현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당대의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가 구입해서 소장했으므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하 간송본)이라 했다.

■<상주본>은 1조원의 가치인가

그후 68년이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 살던 배익기씨가 또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했다. 전문가들은 <간송본>과 동일판본인 이 해례본을 <상주본>이라 했다. 그런데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에 달하고, 보존상태도 <간송본>보다 훨씬 좋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졌다. 왜 이런 평가가 나왔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 2011년 9월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상주본>의 감정가액을 의뢰하자 문화재위원들이 모여 ‘금전적 가치가 부적절한 무가지보지만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으로 판단한 게 빌미가 됐다. 이후 <상주본>을 꽁꽁 숨겨놓은 배익기씨는 ‘1조원’이라는 금액에 ‘꽂힌’ 나머지 1조원의 10%을 달라고 버텨왔다. 심지어 2017년 4월 재선거에 출마한 배익기씨는 자신의 재산을 1조4800만원으로 신고하려다가 ‘실물 소유를 확인할 수 없어서 불가하다’는 상주시 선관위의 이의 제기 때문에 무산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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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8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상량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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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본은 불완전한 진본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가치가 높은 것일까.

기자가 이 해례본 취재를 위해 <상주본>을 직접 실사했거나 연구한 학자들과 연락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말한 내용이 있었다,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은 오해이며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주본>의 가치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상주본>의 경우 원소장자가 행간에 이 책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일종의 메모(주석)이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이 주석이 대단한 식견을 가진 이의 기록이며 이 내용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원 소장자가 어떤 가문의 학자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상주본>은 학술적인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유물로서의 가치는 <간송본>과는 견줄 수 없는 깜냥이 안된다. 물론 <간송본>에도 흠결은 남아있다. 총 66쪽(33장) 가운데 표지와 세종의 어제 서문 등 앞부분 4쪽(2장)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66쪽 중 62쪽이 건재하다.

하지만 <상주본>의 경우 66쪽 가운데 무려 18쪽이 떨어져 나갔다. 2008년 배익기씨의 공개 때 <상주본>을 실사한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상주본>의 경우 세종의 어제 서문·예의 8쪽(4장)과 해례 부분 8쪽(4장), 뒷부분의 정인지 서문 2쪽(1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분명히 밝혔다. 4쪽이 없는 <간송본>에 비해 <상주본>은 18쪽이 없으니 ‘불완전한 진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공개 당시 국립국어원장으로서 하루늦게 안동으로 달려가 원본 일부와 편집 이전의 안동 MBC 촬영본을 검토했다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공개된 자료 중 가장 앞면의 경우도 3분의 1이상 부식되었다”면서 “<상주본>의 보존상태가 <간송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밝혔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간송본>의 경우 3쪽 정도는 남아있는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 및 ‘예의’ 부분이 <상주본>에는 단 1쪽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상주본>은 나중에 일부가 화재 때문에 일부 훼손됐다고 했는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고의적인 훼손이 의심스럽다”면서 “<상주본>은 문화 유물로서의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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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 30일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됐다는 조선일보 보도. 국어학자 방종현과 홍문기는 이후 5회에 걸쳐 원본 훈민정음 해례 부분을 번역 요약해서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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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본>을 지킨 사람들

이렇게 불완전한 <상주본>을 두고 <간송본> 보다 보존상태가 좋니, 후대에 표제와 주석이 새롭게 더해졌으니 학술가치는 대단하니 하는 평가가 상식처럼 퍼졌다. 굳이 다른 사람을 예로 들 필요가 없다. 기자의 기사에서도 복사한 것처럼 붙어있다. 제대로 된 ‘팩트체크’ 없이 기사를 쏟아냈으니 낯부끄럽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자는 이러한 보존상태로만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그 유산의 값어치만 따질게 아니다. 그 문화유산을 알아보고 지켜냈으며, 많은 이들과 공유한 사람의 향기가 더욱 그 유산의 가치를 높인다.

<간송본>을 보자. <간송본>의 원소장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경북 안동의 진성 이씨 가문 인물인 이한걸(1880~1950)’이며, 이것을 당대의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에게 매각한 이는 ‘이한걸의 아들인 이용준’으로 알려졌다. <해례본>의 가치를 알리고 매매를 중간에서 도운 이는 이용준의 서울 경학원(성균관대 전신) 시절 스승인 김태준(1905~1950)이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용준이라는 인물이 판 것은 똑같은데, 출처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즉 이용준(이한걸의 3남)이 처가(광산 김씨 안동 종가)에서 유출했다는 주장이다. 이용준의 처조카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할아버지(이용준의 장인)가 고모부(이용준)에게 ‘선비가 남몰래 책을 춤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 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두가지 버전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맞다고 손들어 줄 계제는 아니다.

다만 이용준의 처조카가 “일부에서 고모부를 도둑이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훈민정음 보존에 공을 세운 셈”이라며 “고모부(이용준)가 훈민정음을 알아보고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평가했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해례본> 매매과정에서 등장하는 국어학자 김태준은 어떤 인물인가. 경성제대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강사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던 김태준은 경성콤그룹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만약 김태준이 <해례본>을 간송이 아니라 당시 경성제대 한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에게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고노는 훗날 “1940년 당시 경성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놓쳤다”고 아쉬워했단다. 그러고보면 이용준이 아니었다면 한낱 벽지로 쓰였을 수도 있었고, 김태준이 아니었다면 일본으로 반출됐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개한 간송 전형필의 공적에는 비할 수 없다. 간송은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면서 <해례본>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외에 중개인에게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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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52년 11월12일 자. 희방사(영주 풍기) 등에서 <훈민정음>를 찍어낸 원판목 400매가 불에 탔다는 기록이다. 제3의 훈민정음 해례본이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 현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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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또 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간송은 훗날(1959년) 영인본 출간과 관련해서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영인본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술회했다. “영인본 출간으로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연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는 <한글학회 100년사>의 평가가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간송본>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아끼고 보존하며 공개하고 연구한 이들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래서 <간송본>은 국보 제70호(1962년 지정)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해례본의 가치를 몰라봤다면 <간송본>은 이미 80여 년 전에 한낱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른다.


■배익기씨의 공로도 있다

반면 <상주본>은 어떤가. 2008년 배익기씨 공개이후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배익기씨가 민사에서 패소하여 <상주본>의 소유권은 조용훈씨(2012년 작고)에게 넘어갔다. 승소한 조씨가 유물을 확보하지 않은채 문화재청에 기증함에 따라 <상주본>은 국가로 귀속됐다. 배씨는 <상주본>을 조용훈씨의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5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절도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배익기씨는 민사에서는 졌지만, 형사에서는 이긴 셈이 됐다.

배익기씨의 공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상주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공개했기 때문이다. 만약 배씨가 아니었다면 <상주본> 역시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배씨는 이용준이나 김태준과 같은 인물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의 문화유산을 인질로 삼아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간송본>의 가치를 알아본 이용준이나 김태준 같은 이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배씨의 용기를 기대한다.(이 기사는 지난 5일 인터넷 판에 2회에 걸쳐 연재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보완한 것입니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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