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9)
프레데릭 쇼팽의 초상화. 니콜라-유스타쉬 모랭의 목탄화. 1845.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기념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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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앙에는 많은 손님이 초대되었다. 손님들은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을 깨는 방편이었다. 개방적인 상드는 자신의 옛 애인도 초대했다. 한때 그녀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던 미셸 드 부르즈도 노앙에 초대되었다. 달변의 그는 저녁 자리에서 여전한 말솜씨를 과시했다. 하지만 그는 40 중반에 이미 쇠약한 모습이었고 그가 떠났을 때 큰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잘 나가는 배우 보카주의 방문은 달랐다. 그는 여전히 당당하고 멋진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드는 잘생긴 그와 친밀한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 둘이 한때 사귀었다는 것이 상드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쇼팽에게 그것은 전혀 즐거운 얘기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질투와 경계의 빛이 돌았다.
쇼팽은 한동안 자기 방에 박혀있었고 보카주가 인근 도시인 라 샤트르에서 연극무대에 섰을 때, 관람하지도 않았다. 상드는 그런 쇼팽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남녀 관계에 대한 관념은 너무 달랐다. 그녀는 쇼팽이 이유 없이 질투를 보였고 토라져서 뚱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했다.
쇼팽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연인 앞에서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구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병약한 자신을 돌보는 상드는 그를 연인이 아닌 아들이나 병자로만 취급하는가? 성적 매력도 없는 그는 노앙의 집에 머무는 하숙생에 불과한가? 아니면 많은 손님 중의 하나일 뿐인가? 쇼팽은 생각이 많은 듯했다.
1843년 여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노앙 근처에서 버려진 장애 아이 사건이 발생했다. 한 어린 소녀가 폭행을 당했고, 아이를 가진 채 버려졌다. 상드는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동지를 규합해서 중앙 정부의 무관심과 지방 당국의 소홀을 깨우기 위해 당국의 허용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것은 상드의 적극적 정치활동의 시작점이었다. 노앙의 집은 그 지방의 행동주의자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조르주 상드 기념 메달. David d'Angers 제작. 월터즈 미술 박물관 Walters Art Museum, 미국 볼티모어.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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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에는 쇼팽과 상드의 아들 모리스가 상드 없이 먼저 노앙에서 파리로 올라갔다. 상드는 두 사람 모두를 떼어놓길 어려워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옆에 없으면 걱정과 염려를 거둘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훌쩍 자란 모리스보다 쇼팽에게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했다. 모리스는 파리와 노앙의 집을 드나들었던 폴린을 유혹하기에 바빴다. 그는 심지어 스페인까지 쫓아가서 남편이 없는 틈을 노릴 정도로 폴린에게 빠졌다.
노앙에 남은 상드는 쇼팽의 상태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으며 그를 염려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쉬워한 것은 연인으로서의 쇼팽이 아니라 자기가 보살펴 줄 대상, 아끼고 보듬어 줄 대상으로서의 쇼팽이었다. 마치 여행 중에 집에 남기고 온 강아지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도 상드의 적극적 정치활동은 이어졌다. 파리의 아파트에서 정치 운동가들의 모임이 잦아졌다. 상드의 아파트에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상드의 동료들이 넘쳐났다. 정치적 구호가 울렸다. 그들을 점잖게 대하려 애썼고, 심하다 해도 자리를 피해 주는 등 배려를 해 주었지만, 쇼팽은 이제 상드의 아파트도 편하지 않게 되었다.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예의와 규범의 준수를 바라는 쇼팽의 성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상드는 그녀와 지향이 일치했던 행동주의자 루이 블랑과 짧게 사귀었다. 쇼팽과 상드의 곁에 있으면서 쇼팽을 위해 의사를 부르러 뛰어다니기도 했던 그와 연애에 빠진 것이었다. 상드는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없었다고 한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에게는 ‘질투심 많은 병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당신에게 달려갔을 거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하기도 했다.
이듬해 초겨울, 누나 루드비카를 보내고 쇼팽은 평소보다 늦게 파리로 돌아왔다. 작곡이 줄어들었으므로 그에 따른 수입도 줄었다. 누나 일행을 맞이하느라 지출은 컸다. 학생들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 감기에 쇼팽은 더 늙어 보였다. 약해진 그는 집 안에 있을 때도 두꺼운 내의를 세 겹으로 입고서 화롯가를 떠날 줄 몰랐다.
친구 음악가가 그를 방문해 보니 그는 레슨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피아노 옆의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필요할 때면 힘겹게 일어나서 학생에게 연주를 들려주었다. 연주할 때는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다. 쇼팽은 외출도 줄여야 했다.
모리스는 들라크루아 밑에서의 견습 생활을 마쳤다. 상드는 아들이 성인으로서 자기 앞날을 개척해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모리스는 무엇보다 먼저 집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하인을 내보냈다. 하인 얀은 양심적이었고 폴란드어로 소통할 수 있어 쇼팽이 애착을 가졌던 사람이었는데 해고되었다. 모리스는 정원사와 다른 또 한 사람의 하인도 내보냈다. 둘 다 상드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일해오던 사람들이었다.
모리스. 상드의 아들. 뒤에 그의 장모가 되는 Josephine Raoul-Rochette의 그림. 1845. 상드의 노앙저택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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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는 새로 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고 하인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드는 아들의 성장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가 폴린의 꽁무니를 따라 다닐 때도 나무라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듯했었다. 그러나 폴린의 남편 루이는 모리스의 행태가 눈에 거슬렸다. 상드는 가정이 있는 폴린을 대신해서 아들에게 맞는 사람을 찾았다.
1845년 6월, 쇼팽과 상드는 노앙으로 내려갔다. 쇼팽은 멋진 4륜 마차를 새로 마련하여 상드를 놀라게 했다. 잘 나가는 멋진 마차로 마지막 구간을 여행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때는 얼마 후 노앙에서 일어날 큰 파장을 예감할 수 없었다. 9월에 모리스가 파리에서 한 아가씨를 노앙으로 데려왔다. 이것은 모든 재앙의 씨앗이었다.
오귀스틴(Augustine Marie Brault)이라고 불린 그녀는 상드의 먼 이종사촌이었는데, 그녀의 생모가 세상을 떠난 후 상드는 어린 그녀의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상드의 모계가 자랑스러운 배경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해 둔다. 상드의 행동은, 과거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사창가에서 상드의 할머니를 구해준 것을 떠오르게 한다. (본 시리즈 22편 참조) 하지만 오귀스틴은 고귀한 영혼의 할머니와 완전히 달랐다.
오귀스틴은 파리의 집에 몇 번 초대되기도 했지만 노앙 방문은 처음이었다. 상드는 평민혈통이라고 그녀를 반겼고, 명랑하고 예쁘다며 주위에 자랑했다. 상드는 오귀스틴의 부모에게 돈을 주고서 그녀를 아예 수양딸로 삼았다. 상드는 오래전부터 딸을 하나 더 원했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딸 솔랑주를 두고 근본이 없는 아가씨에게 사랑을 쏟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귀스틴은 그해 겨울부터 가족의 일원으로 아예 같이 살았다.
솔랑주에게 이것은 비극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때는 재능과 지성을 갖춘 폴린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키우더니 이제는 자기보다 못한 여자애를 데려와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절망한 솔랑주는 빨리 배우자를 찾아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쇼팽은 솔랑주가 받을 마음의 상처를 염려했다.
쇼팽은 상드의 친구 중 행동파 저널리스트와 급진적 노동운동가의 거칠고 예의 없는 행동은 참아냈지만, 가족이 된 오귀스틴의 상스럽고 버릇없는 언행을 참기는 어려웠다. 오귀스틴은 쇼팽의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모리스에게 아양을 떨었고, 그는 그녀를 노리개로 삼았다. 상드가 원한 것이 딸이었는지 아들의 위안거리였는지 불분명했다.
오귀스틴은 집안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파악했다. 그리고는 힘이 없는 사람들은 무시했다. 번번히 쇼팽, 솔랑주와 부딪혔다. 오귀스틴의 뒤에는 모리스가 있었고, 그 위에는 집주인 상드가 있었다. 상드는 모리스를 꾸짖어야 할 때도 중립을 지킨다며 조용히 있거나, 다툼을 외면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솔랑주. 조르주 상드의 딸. 클레징제 그림. 1849년. Musee de la Vie romantique, Paris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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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여름, 사건이 터졌다.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의 친구로서, 바르샤바에서부터 잘 알던 초스노프스카 부인이 노앙을 방문했을 때였다. 상드는 그 부인의 화려한 옷과 짙은 향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쇼팽의 초대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리스가 비호하는 가운데, 오귀스틴이 점잖은 분위기를 깨는 저질스런 농담으로 문제를 발생시켰다.
쇼팽은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갔겠지만 이번에는 화를 냈다. 그는 집안에서 지저분한 언행은 삼가라고 소리쳤다. 이것은 집안에서 쇼팽이 대놓고 목소리를 높인 첫 사례였다. 모리스가 나섰다. 그는 자기만이 여자들과 하인에게 명령할 수 있다며 오귀스틴을 감싸고 돌았다. 그녀는 기고만장해서 쇼팽과 솔랑주를 조롱했다.
상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했다. 상드의 눈에는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아들이 어느덧 성장해서 집안을 휘어잡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쇼팽도 초스노프스카 부인에 대한 상드의 반감을 읽을 수 있었다. 모리스와 오귀스틴은 그런 상드의 속내를 알아채고 행동한 것이 분명했다. 노앙의 집에도 쇼팽의 편은 없는 듯했다.
그러던 중 오귀스틴의 아버지, 조셉은 모리스와 오귀스틴의 결혼을 재촉했다. 그는 상드의 재산을 의식했을 것이다. 상드는, 모리스가 아직 어리고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조셉으로 하여금 결혼이 더 멀어졌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겨울의 노앙 저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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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드가 자기 딸을 사서 모리스의 매춘부로 만들었다고 외치고 다녔고, 나아가 상드를 비난하는 자극적인 인쇄물을 만들어 주위에 뿌렸다. 상드는 가까스로 그것의 확장을 막았지만, 평판에 손상을 입었다. 남녀관계에 관한 도덕적 기준이 모호한 상드의 태도나 관념이 여실히 드러났다.
더 약해지고 더 보살핌이 필요한 쇼팽의 마음은 불편해져만 가고 있었다. 심상찮은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그는 고립돼 갔고 주위에 위안거리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쇼팽은 몸과 마음의 아픔을 숨기고 참아야만 했다.
다음 이야기는 쇼팽과 자신의 관계를 소재로 한 상드의 소설이 일으킨 파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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