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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오직 그림만이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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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3. 판위량 ‘자화상’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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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인형 ‘리얼돌’이 어느 날 마법을 얻어 자아를 가지게 됐다고 상상해보자. 남성들에겐 그만한 ‘충격과 공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술과 웃음을 팔던 ‘기생’이 ‘중국 최초의 여성 유화가’가 된 것이다. 그 주인공은 판위량(1899~1977)이다.

판위량의 유년 시절은 쑥대밭과 다름없었다. 첫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마저 8살 때 세상을 떠났다. 혈육이라고는 아편쟁이 도박중독자 외삼촌뿐. 그는 조카의 몸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당시 14살인 위량을 상하이 기방에 창기로 팔아버렸다. 기방은 지옥이었다. 심지어 동료 기생이 남자 손님의 싸움에 휘말려 애꿎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런 운명을 피하기 위해 위량은 도망도 치고 자살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1913년 새로 부임한 세관 감독 판짠화(1885~1959)를 만나면서 위량의 인생은 바뀐다. 지역 유지들이 판짠화를 성접대하기 위해 관저로 위량을 보냈던 것. 청렴했던 판짠화는 위량을 돌려보내려 했고, 그냥 유곽으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던 위량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위량은 판짠화의 후실이 됐다.

다행히 판짠화는 위량의 예술적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위량에게 가정교사를 붙여줬고, 1918년엔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도왔다. 위량은 실력이 있었다. 1921년엔 국비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1927년에는 이탈리아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습작 유화 <나녀>로 중국인 최초로 3등에 당선돼 상금 5천 리라를 받았다. 이 모든 성취를 안고 위량은 1928년 마침내 귀국한다. 금의환향이었다. 그녀는 모교인 상하이 미술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29년에는 제1회 전국미전에 참가해, 중국 서양화가 중 최고의 인물로 선정됐다. 탄탄대로가 예정돼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기방의 상품이었던 ‘리얼돌’이 감히 인간의 얼굴로 활동하다니, 남성들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위량의 재능이 세상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중국 남성들의 치부가 조금씩 공개되는 셈이었다. 위량은 중국 남성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었기에, 반드시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야만 했다. 언론은 악의적인 기사를 연일 쏟아냈다. 이때 위량은 자화상을 그린다. 평범한 단발머리에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범하지도, 수수하지도 않다. 날렵한 눈썹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을 짐작하게 하고, 쏘아보는 눈빛은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앙다문 입술에서는 남다른 의지가 엿보인다. 어쩌면 이 그림을 그리면서 위량은 ‘다시 중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위량의 3번째 개인전 때 일이 터졌다. 전시장에 걸린 위량의 대형 유화 <인력장사>를 교육부 장관이 고가에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전시회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림은 온통 찢겼고 사방에는 ‘몸 파는 창녀가 나체 화가가 되다’라고 쓴 전단지가 나뒹굴었다.

결국 1937년 위량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다행히 파리는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실력만 보았다. 1958년에 열렸던 파리 첫 개인전에서는 내놓은 작품이 모두 팔릴 정도였고,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입성시켰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았던 위량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버티다가 1977년 중국인으로 죽었다. 위량의 유작이 중국에 돌아온 때는 1995년. 자신의 분신과 같은 그림의 형태로, 위량은 비로소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무려 58년 만이었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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