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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미술의 세계

화폭에 물든 러시아 민중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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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절망 속에 존재하는 희망 그려/ 러 국립미술관 도슨트인 저자/ 친절하고 재밌는 해설 돋보여

세계일보

바실리 페로프의 1865년 작품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 18~20세기 러시아의 민중들이 감당해야 했던 혹독한 삶의 굴곡이 담겨 있다. 자유문고 제공


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는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을 떠나는 혁명가들이 기차 창틀 사이로 햇빛을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현실의 불합리를 견디지 못한 많은 이들이 황제의 압제에 반대해 민중운동을 한다. 그들은 체포된 후 정치범이란 죄명을 안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수형 열차가 간이역에 정차한 사이 가족은 아이를 안고 햇살을 즐긴다. 엄마는 자신의 하루 식량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빵 한 조각을 떼어 내 아이들에게 나눔의 아름다움을 가르친다.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은 후 그 감동으로 이 그림을 완성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말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상’으로 유명한 바실리 페로프의 1865년 작품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에는 누군가가 사각 관에 실려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림 속의 아빠가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이 집의 가장이 관에 누워 있다. 관을 감싸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은 울다 지쳐 눈물도 말라 버렸다. 엄마의 어깨는 절망감으로 땅으로 꺼질 것 같다. 이들 가족의 아픔을 더욱 처량하게 더하는 건 서글픈 석양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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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 이야기 김희은/자유문고/2만3000원


20여년간 러시아에서 살며 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과 푸시킨 박물관 도슨트를 하고 있는 저자의 두 그림에 관한 해설이다. 저자는 신혼 시절 남편 유학길을 따라 모스크바에 눌러앉은 후 박물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그림 공부에 빠져 러시아 그림 전시기획자, 아트딜러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그림 전문가다. 그는 “제가 (러시아 그림에 대해) 이만큼 알고 이만큼 공부했고 이만큼 경험했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행복했고 저 그림을 보고 이렇게 안타까워했는지 공감을 얻고 싶다”며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러시아의 그림 이야기’는 가히 러시아 대서사시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중세와 근대기의 러시아는 차르로 대표되는 전제 군주의 폭압과 전쟁 등으로 민중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고통과 절망만이 횡행했다. 지배 계급의 착취는 당연했고, 민중들은 삶의 가혹한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변화와 개혁의 요구는 당연했으며, 결국 민중들은 혁명을 택했다. 화가들은 이러한 민중들의 삶을 화폭에 옮겼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자가 소개한 그림들에는 18~20세기 러시아의 역사와 사회상, 민중들이 감당해야 했던 혹독한 삶의 굴곡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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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을 떠나는 혁명가들이 기차 창틀 사이로 햇빛을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절망 속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감정을 얘기하고 있다. 자유문고 제공


저자의 쉽고 친절한 그림과 해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시기 러시아 사람들이 살았던 역사의 현장이,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다가온다.

러시아 그림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사실주의다. 러시아 화가들은 민중의 눈과 귀가 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화가들은 현실 속 민중의 고통, 절규, 절망 등을 화폭에 담으면서, 또 한편으로 미래의 희망을 함께 그려내고 있다. 절망 속에 존재하는 희망, 이것이야말로 작가들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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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전시기획자와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갤러리 까르찌나 김희은 대표는 “우리에게 미국이나 유럽을 통해 전해진 러시아 문화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왜곡될 여지가 많다”며 “(제가 설명하는) 러시아 그림을 통해 그들의 생활과 전통문화, 희로애락 등 러시아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다수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의 그림이 갖고 있는 다양한 표정, 즉 화가가 그림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다양한 의미를 알기 쉽고 폭넓게 알려 준다. 그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전체 메시지와 시대적 배경, 상황 등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그림에 쓰인 소품 하나, 빛의 명암, 인물 방향, 옷차림 등 소소한 것들에서까지 그 의미를 추출해 보여 준다. 이를 통해 당대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상, 러시아의 전통문화와 의식주 등 다양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그의 친절하고 재밌는 그림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이 한결 더 가까워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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