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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시선2035] 편하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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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미성년 시절의 고통을 성년이 되어 축소 평가하고 싶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는다고 느끼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내가 안타까워 나라도 이해해 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십 년도 지난 수능 날의 고통을 끄집어 내본다.

그 날은 12년의 제도권 교육을 어깨에 몽땅 짊어진 채, 앙상한 외나무다리를 편도로 건너는 날이었다. 저 뒤로 육지에서 ‘수능 대박’ 팻말을 흔드는 선생님, 부모님과 점점 멀어진다.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독의 길. 아, 옆 사람 콧물 훌쩍이는 소리와 뒷사람 다리 떠는 소리도 들린다. 지나온 길 한 번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한 번만 삐끗해도 세차게 흐르는 패배의 강물로 떨어진다. 저 멀리서 부모님이 보면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여기로는 대통령 할아버지도 구하러 와줄 수 없는 현존하는 가장 공정한 시험이다. 잠깐, 이럴 시간이 없다. 십 분 남았는데 뒷장 아직 못 봤다.

“수능 대박” 목소리가 커질수록 ‘미대박’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던 것을 기억하는지. 벌겋게 시험 치르고 나와 처음 마주한 것은 차갑고 어두컴컴한 겨울 공기 속 ‘수능 대박’ ‘잘 보세요’ 같은 현수막들이었다. 집에 못 가겠어. 지구 종말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1999년 12월 31일 오후 11시 45분의 심정으로 PC방엘 갔다. 집이 따뜻한 걸 알아도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발걸음엔 버거운 부담감과 걱정이 묵직한 모래주머니처럼 매달렸다. 그 시절 고통을 잊고 성년이 된 우리가 영혼 없이 또 “수능 대박”을 응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대박이 안 나도 별일 없는 삶을 살았으면. 노력했다는 사실이 변함없기에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면. 자신에 대한 존중감도,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축하받아야 할 졸업도 그대로이길. 어차피 대학 좀 잘 간다고 용 되는 승천길에 오르는 것도, 탄탄대로 취업길이 열리는 것도 아닌 세상, 어떤 결과가 나와도 천지가 개벽하지도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걸 말해주자. “편하게 봐.”

문현경 탐사보도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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