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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기자의 시각] 인간 심판의 苦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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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순흥 스포츠부 기자


"심판들이 훌륭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도 결국 사람이다."

롭 맨프레드 미 프로야구(MLB) 커미셔너는 최근 "내년부터 자동 볼 판정 시스템(ABS·Automated Ball-Strike System)을 일부 마이너리그 경기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투수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는지를 판별하는 기술인 ABS는 이른바 '로봇 심판'으로 불린다. ABS는 각 선수의 체형 등을 고려해 일정한 스트라이크존을 설정하고 공이 그 범위를 벗어나면 한 치 오차 없이 '볼'로 선언한다.

이 시스템을 적용하면 기존 볼 판정을 하던 구심(球審)은 컴퓨터가 판독한 결과(스트라이크 또는 볼)를 단순히 복창(復唱)하는 역할에 그치게 된다. 전통적 야구의 관념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다. 올해 독립리그에서 처음 '로봇 심판'을 시험한 MLB 사무국은 그 범위를 마이너리그, 장기적으로는 메이저리그까지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공 하나에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가 야구다. 바꿔 말해 잘못된 볼 판정 때문에 승리를 눈앞에서 날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올해 월드시리즈, 한국시리즈에서도 볼 판정 시비가 있었다. 지난 4월 미국 보스턴대 연구에 따르면 2018년 메이저리그에선 3만4294개의 볼 판정 오심(誤審)이 나왔고 이는 매 경기 14개 수준이었다.

사람이 내리는 볼 판정의 취약점은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과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존이 달라지고, 같은 코스의 공에 다른 판정을 내린다. 때론 심판이 포수의 눈속임(프레이밍)에 당하기도 한다. 연속 2스트라이크 이후엔 보통 타자에게 다소 관대한 볼 판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로봇 심판이 호응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미국 독립리그 선수는 "(자동 볼 판정 시스템이)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일관적이다. 공정하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독립리그 선수와 감독 모두 그 일관성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야구팬들은 '자동 볼 판정 시스템이 하루빨리 KBO 리그에 도입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로봇 심판의 일관성이 만든 공정함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셈이다.

로봇 심판은 이렇게 '인간 심판'을 경기장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볼 판정에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신(神)판'의 입지는 앞으로 더 흔들릴 것이다. 모두 인간이 자초한 결과다. 그렇다면 정녕 심판이 살아남을 길은 없을까. 더 엄격하고 공정한 룰을 만들어 한결같이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로봇이 될 수 없다면 로봇같이 정확한 판정을 내리도록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설사 실수가 있어도 지켜보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금 세상의 화두는 공정(公正)이다. 살아남기 위한 인간 심판의 고투(苦鬪), 이것이 우리 시대 프로페셔널이 공정을 지키기 위해 가져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

[이순흥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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