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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목멱칼럼]김지영·앨리스·안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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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우 전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 전문위원

1. 직장생활을 하다 육아를 위해 전업주부가 된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씨. 김씨의 삶은 아기를 위해, 아기에 의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의 ‘하루살이’ 형태가 결정된다. 김씨의 육아 실상은 ‘이마에 맺힌 땀’이 마를 새도 없는데, 막상 남들에게 드러나는 모
이데일리

습은 한가롭고 우아하게 유모차를 미는 것으로 비쳐진다.

2. 영화 ‘스틸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존경받는 언어학 교수로 의사인 남편과 장성한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중년의 삶. 하지만 직장과 가정에서 흘렸을 과거의 땀과 눈물은 앨리스의 건강 악화로 의미가 퇴색된다.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어”라는 남편의 진심 어린 말이 앨리스가 맞닥뜨린 상황과 대조를 이루며 더 아프게 들린다.

3. 프랑스 영화 ‘아무르’의 안느는 명예로운 은퇴 이후 동료 음악가였던 남편과 제자들의 공연을 보는 등 행복한 노후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경동맥이 막히는 것을 시작으로 몸이 마비되고, 기억과 의식을 잃어가다 결국 자존감을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김지영, 앨리스, 안느. 이들 모두는 치매(Dementia)를 앓거나 비슷한 정신질환 증상을 보인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스스로 부끄럽지는 않겠지”라는 앨리스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치매는 다른 차원의 고통을 동반한다. 나아가 가족 구성원 가운데 치매 환자가 발생하면, 그 부담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의 질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18년 국내 65세 이상 노인인구 중 치매환자는 75만 명에 달한다.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 85세 이상 노인 2명 중 1명은 치매환자로 추정된다. 2025년에는 치매환자가 100만명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치매를 국가에서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치매 의료비 90%를 건강보험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가책임제를 공약했다.

△치매지원센터 확대 △치매안심병원 설립 △노인장기요양보험 본인부담 상한제 도입 △치매 의료비 90% 건강보험 적용 △요양보호사의 처우 개선 △치매 환자에게 전문 요양사를 파견하는 제도 도입 등의 내용을 담았다.

치매는 발병 환자의 연령이 고령일수록, 환자의 성별이 남성인 경우, 돌봄 노동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여성 가족 구성원이 있는 경우일수록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환자 가족 내의 혼란이 줄고 혼돈의 시간도 짧은 것으로 다수의 연구 결과로 확인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치매 환자의 연령이 어리고 환자가 여성이며 심지어 가사까지 전담했다면 그 가족이 부담해야 할 ‘돌봄의 무게’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상황이 바로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아닐까 싶다.

김 씨의 병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 악화할 일만 남았다. 특히 치매환자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지는 경우는 없다. 반면 김씨의 아기는 유아기-아동기-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주어진 수많은 발달과업에 더해 종종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적응까지 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가혹한 시간의 연속이 눈앞에 놓여있다.

우리 사회가 이런 가혹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아찔하다. 조기 발병 치매 환자 숫자 등 기초 사실에 관한 정확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안 돼 있다는 평가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아동발달 연구 학자인 줄리 폴만 교수는 감옥에 간 부모를 둔 아이들의 발달과정 및 학교생활 적응 등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다. 폴만 교수는 인간에게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지원하는 인터벤션(intervention·개입)의 효과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인터벤션의 효과는 인간의 경험적·사고적 유연성과 비례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릴 때 적절한 개입이 있었을 경우 이후 삶에 더 긍정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기 발병 치매환자의 어린 자녀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적극적 지원으로,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한다. 아이를 위해 나머지 성인 가족 구성원과 이웃,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국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젠더 갈등 여부만 논하기엔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여성 아닌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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