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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승자의 저주 [논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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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왼쪽)이 12일 서울 용산구 현대산업개발 본사 대회의실에서 아시아나 항공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과 관련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피루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 보람 없는 승리, 희생이 아주 커서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가 로마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병력의 3분의1 이상을 잃을 정도로 희생이 크자 “이런 승리를 또 한 번 거두었다간 우리가 망할 것이다”고 말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2001년 영국에서 ‘구제역 파동’이 일어나 가축 수백만 마리가 살처분당했다. 당시 수의사들은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식의 초토화 정책으로 구제역을 근절한다고 해도 그것은 피루스의 승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피루스의 승리를 경제학에선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라고 한다. ‘승자의 재앙’이라고도 한다. 치열한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승리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치름으로써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되거나 커다란 후유증을 겪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1950년대에 미국 석유기업들은 멕시코만의 석유시추권 공개입찰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에는 석유 매장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하였다. 기업들은 석유 매장량을 추정하여 입찰가격을 써낼 수 밖에 없었는데 입찰자가 몰리면서 과도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2000만 달러로 입찰가격을 써낸 기업이 시추권을 땄지만 후에 측량된 석유 매장량의 가치는 1000만 달러에 불과하였고, 결국 낙찰자는 1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 ‘승자의 저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의 승자는 HDC현대산업개발이다. 아시아나를 인수하면 현재 재계 33위인 HDC그룹은 일약 17위로 도약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아시아나의 막대한 부채와 불안정한 잉여현금 흐름 등을 들어 불안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과거 많은 인수합병(M&A) 사례에서 보듯 ‘승자의 저주’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HDC 측은 타사와 달리 과도한 파이낸싱(자금조달) 대신 상당 부분 자체 자금으로 인수하는 만큼 그러한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승자의 저주는 단순히 인수 기업의 고통에 머물지 않고 한국 경제 전체의 부담으로 전이될 수 있는 점에서 HDC의 순항을 기대한다.

박창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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