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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만물상] 살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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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에서 돼지 4500마리를 키우는 고향 친구가 있어 돼지 지능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상당하다"고 했다. 우선 '똥자리'를 구별할 줄 안다. 우리를 쇠창살로 구분해 놓는데 꼭 이웃 우리 쪽으로 가서 볼일을 본다는 것이다. 서열도 엄격해 사료 먹는 것도, 뽀송뽀송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순서대로라는 것이다. 미로(迷路) 통로도 정확히 구별한다고 했다. 통제가 안 돼 그렇지 후각 자체는 마약견보다 낫다고 한다. 돼지 인지(認知) 능력이 개, 침팬지 수준이라는 국제학술지 연구 결과도 있다.

▶전염병 때문에 멀쩡한 돼지까지 처분해야 하니 그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겠나. 요즘은 그래도 선진화됐다고 이산화탄소 가스 주입법, 근육이완제 주사법 등을 쓴다고 한다. 그래도 묘사하는 것조차 꺼려진다. '살처분(eradication)'이라는 용어도 '농장 비우기(depopulation)'로 바꿔 쓴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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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소, 닭, 오리 등의 살처분에 예전엔 공무원과 군인이 많이 동원됐다. 2014~2015년 무려 2500만마리 닭·오리를 처분할 때 공무원 노조가 들고일어났고 군인 부모들도 반발했다. 그 뒤론 주로 외주업체 용역 인부들을 쓰는데 다수가 외국인 노동자다. 하루 일당으로 건설 현장의 1.5배를 주고 체류 신분을 따지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언어가 안 통하니 행동 수칙을 정확히 교육하기 어렵고, 주거도 불명확해 사후 관리에 애를 먹게 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중국서만 1억마리 돼지가 살처분을 당했다고 한다. 이 병이 전 세계 50국으로 퍼졌는데 최종적으론 지구상 돼지의 25%가 처분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백신이 개발돼 있지 않고, 100% 치사율인 데다가, 바이러스가 가공육에서도 몇 달을 생존할 정도여서 현재로서는 대규모 살처분 외의 대응 수단이 없다. 짧은 시간에 인력을 동원해 수만마리를 처분하다 보니 '핏물 침출수 하천 유입' 같은 일도 벌어진다.

▶TV에서 이베리코 돼지 사육 장면을 본 일이 있다. 스페인 농부가 장대를 들고 숲속을 다니면서 상수리나무 가지를 흔들면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지고 돼지들이 따라와 주워먹는다. 일이라기보다 느긋한 숲속 산책 같았다. 반면 국내 축주(畜主)들은 작년부터 트럭에 GPS를 의무적으로 달고 다녀야 한다. 중국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관청에 상세히 보고해야 한다. 좁은 나라의 대량 가축 사육이 정말 힘들다.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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