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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인권위의 ‘혐오표현’ 잣대 공식입장 따로, 리포트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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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현행법상 피해자 특정 없이

인권위, 혐오표현 규제 못해

김문수 전 지사 ‘각하’결정


정치인 혐오표현, 리포트엔

“해악성 커 긴급 대응해야”


리포트 작성한 전문가들

“법 아닌 인권위 입장 중요”


“병신 같은 게….” “동성애는 담배보다 유해하다.” “세월호는 죽음의 관광.” 최근 수년간 정치인들 입에서 쏟아진 말들이다. 정치인들의 말은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된다.

이들의 소수자 혐오표현을 통제할 기구도 제도도 없다. 혐오표현 피해구제를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원회는 “피해가 특정되지 않았다”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며 진정에 각하 결정을 내리거나 진정 자체를 오래 묵혀둔다.

인권위는 지난달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혐오표현에 대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한 ‘혐오표현 리포트’를 발간했다. 정치인들의 혐오표현에 대한 인권위의 공식 입장과 리포트는 충돌한다.

인권위는 지난해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사진)의 혐오표현에 대한 진정을 최근 각하 결정(경향신문 11월12일자 8면 보도)했다. 진정이 제기된 지 약 1년5개월 만이다. 인권위는 각하 결정 이유를 “김 전 지사의 발언이나 선거공약만으로 구체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한 조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피해자가 특정돼야 하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위가 있어야 혐오표현에 의한 피해가 있었다고 본다.

인권위 입장은 현행 사법체계에서 혐오표현을 다루는 기준과 동일하다. 현행법상 혐오표현에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을 적용할 때는 피해자가 특정돼야 한다.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혐오표현에 대해선 법 적용이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민·형법의 논리에 갇힌 채 혐오표현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

인권위의 ‘혐오표현 리포트’는 사법체계가 다루지 못하는 혐오표현을 별도로 다뤄야 할 필요성을 짚었다.

리포트는 ‘혐오표현으로 개인이 특정될 수 있는 경우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로 규율될 수 있지만 집단 전체에 관한 표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혐오표현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혐오표현을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썼다. 정치인의 혐오표현 해악성이 커 긴급하게 대응해야 한다고도 했다. 리포트에는 ‘정치인, 주요 정당 인물, 고위 공무원, 종교 지도자 등 사회적 영향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의 혐오표현은 해악성이 매우 크기에 긴급하고 강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정작 인권위는 정치인의 혐오표현에 대한 진정에 ‘시간끌기’로 대응해왔다. “정치권에 정신장애인이 많다”고 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진정도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리포트 작성에 참여한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혐오표현을 하는 후보자에게 주의 조치를 하고 제재를 가하라는 정책 권고밖엔 없다”고 했다.

인권위는 선관위에 정치인의 혐오표현을 제재하라는 정책 권고나 의견 표명도 하지 않았다.

리포트 작성팀이었던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 ‘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방식으로는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정치인 혐오표현을 막을 수 있는 건 법이 아니라 인권위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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