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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김문수 혐오표현 피해 특정 어렵다"는 인권위, '혐오표현 리포트'에선 "정치인 혐오표현 해악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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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28일 혐오표현의 개념과 사회적 해악에 대해 다룬 ‘혐오표현 리포트’를 발간했다. 인권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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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같은 게…” “동성애는 담배보다 유해하다” “세월호는 죽음의 관광” “정치권에는 정신장애인이 많다”…. 최근 수년간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입에서 쏟아진 말들이다. 정치인들의 소수자 혐오표현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다. 이들의 발언은 공인이라는 이유로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된다.

정치인들의 혐오표현을 통제할 장치는 없다. 혐오표현 피해구제를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원회는 “피해가 특정되지 않았다”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며 진정에 각하 결정을 내리거나 진정을 오랜 기간 묵혀둔다. 인권위는 지난달 ‘혐오표현 리포트’를 발간했다.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혐오표현에 관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다. 정치인들의 혐오표현에 대한 인권위의 공식 입장은 정작 자체적으로 내놓은 혐오표현 리포트와 충돌한다.

■인권위 “구체적 피해·피해자 없다” vs 리포트 “개인 특정 안 돼도 혐오표현”

인권위는 지난해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의 혐오표현 진정을 각하 결정했다고 13일 밝혔다(경향신문 11월12일자 8면 보도). 진정이 제기된 지 약 1년 5개월 만이다. 인권위는 각하 결정 이유로 “김 전 지사의 발언이나 선거공약만으로 구체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한 조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최근 정치인의 혐오표현 진정이 늘어남에 따라 정책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 전 지사는 지난해 지방선거 유세에서 “여성은 자기를 다듬어줘야 된다” “동성애는 담배보다 유해하다” “동성애로 에이즈가 늘어난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투쟁을 두고는 “죽음의 굿판” “죽음의 관광”이라고 했다. 이외에 ‘퀴어문화축제 금지’ ‘서울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삭제’와 같이 성소수자 인권을 후퇴시키는 공약도 내놓았다. 시민단체는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한 자유한국당 여상규 의원과 황교안 대표와 홍준표 전 대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등에 대해서도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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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가 지난해 6월 10일 서울 서초구에서 열린 이동 유세중 시민들에게 한표를 호소하며 경례를 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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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는 김 전 지사의 혐오표현 진정을 현행법에 따라 처리했다는 입장이다. 차별행위와 그 피해를 명시한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은 이를 협소하게 정의해놓았다. ‘고용, 재화·용역·교통수단·상업시설·토지·주거시설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시설이나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그 이용과 관련해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됐다. 피해자가 특정돼야 하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위가 있어야 혐오표현에 의한 피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인권위의 입장은 현행 사법체계에서 혐오표현을 다루는 기준과 동일하다. 현행법상 혐오표현에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을 적용할 때는 피해자가 특정돼야 한다.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혐오표현에 대해선 적용이 불가능하다. 집단 전체에 대한 전방위적인 혐오표현 피해구제를 담당하는 인권위가 가져야 할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인권위는 리포트에서도 사법체계에서 다루지 못하는 혐오표현을 별도로 다뤄야 할 필요성을 짚었다. 리포트에는 ‘혐오표현으로 개인이 특정될 수 있는 경우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로 규율될 수 있지만 집단 전체에 관한 표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혐오표현을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혐오표현을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돼 있다.

■인권위, 정치인 혐오표현 진정 ‘시간끌기’ vs 리포트 “정치인 혐오표현 해악성 매우 커 긴급 대응”

인권위는 정치인의 혐오표현 진정에 대해 ‘시간끌기’로 대응해왔다. 김 전 지사에 대한 진정은 약 1년5개월 만에 결정 났고, “정치권에는 정신장애인이 많다”고 발언한 이 대표에 대한 진정은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권위는 리포트에서 정치인의 혐오표현 해악성이 커 긴급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리포트에는 ‘정치인, 주요 정당 인물, 고위 공무원, 종교 지도자 등 사회적 영향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의 혐오표현은 해악성이 매우 크기에 긴급하고 강한 사회적 대응 필요하다’고 돼 있다.

인권위는 김 전 지사의 혐오표현이 선거 유세나 토론회 등 청중이 많은 장소에서 이뤄졌음에도 해악성이 크다고 보지 않았다. 리포트는 ‘혐오표현의 도달 범위와 규모가 클수록 해악의 위험성 또한 높게 나타난다’고 봤다. 청중의 규모와 더불어 발화된 장소를 고려해야 하며, 혐오표현이 널리 공개돼 좀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라면 해악의 정도가 크다는 진단이다.

리포트에서는 선거 유세나 일상적인 정치 상황에서 혐오표현이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리포트에 따르면 ‘일상 정치 또는 선거가 임박한 상황에서 대상집단에 관한 차별과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인 시도가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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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28일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에 포함된 여론 설문조사. 인권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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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는 정치인이 혐오를 조장하며 이에 반대를 표명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견도 리포트에 담았다. 인권위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지난 3월 성인 120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58.8%)이 국회의원 등 정치인이 혐오를 조장한다고 답했다. 이로 인한 혐오표현이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은 81.8%에 달했고, 사회갈등 심화(78.4%), 차별의 고착(71.4%), 사회적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 위축(62.8%) 등이 뒤를 이었다. 응답자 82.3%는 정치인의 혐오표현에 반대를 표명해야 한다고 했다.

■리포트 작성팀이 본 인권위…“법 상관없이 혐오표현 해악 알려야”

리포트 작성팀은 인권위가 혐오표현을 규제할 때 법적 제약이 있음에도 혐오표현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봤다.

리포트 작성에 참여한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르면 진정 사건의 경우 인권 침해를 받은 사람이 특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책 권고로 넘어간다. 인권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혐오표현을 하는 후보자에 주의 조치를 하고 제재를 가하라는 정책 권고 밖엔 없다”고 했다. 인권위는 선관위에 정치인의 혐오표현을 제재하라는 정책 권고나 의견 표명 또한 하지 않았다.

리포트 작성팀이었던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김 전 지사에 대한 인권위의 결정을 두고 “인권위의 혐오표현 정책 흐름에 반한다”고 봤다. 조 변호사는 “인권위가 정치인의 혐오표현에 대해 구체적인 피해가 없다고 본 것은 혐오표현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혐오표현의 해악은 차별에 놓여 있는 사람이 더욱 심각한 차별에 놓여지게 되는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조 변호사는 “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방식으로는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법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좁다. 정치인 혐오표현을 막을 수 있는 건 법이 아니라 인권위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그는 “결정 등을 통해 혐오표현의 문제와 해악을 명확히 알리는 게 인권위가 법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역할이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효과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권위 리포트에는 혐오표현 해결에 대한 인권위의 역할이 구체화돼 있다. 리포트에는 ‘인권위가 혐오표현을 조치하는 국가 역할의 중추’라고 적혔다. 인권위가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정책 방향과 대안을 마련해 그에 대응하는 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라고 했다. 사회 핵심영역에서 혐오표현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고 대응책 수립과 그 실효적 집행을 해야 한다고 적시됐다.

김 전 지사의 혐오표현 진정인 측인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김 전 지사의 혐오표현에 대해선 당사자인 세월호참사 유가족 4·16가족협의회도 진정에 참여했다. 혐오발언을 들은 사람들은 순간의 구체적 피해를 경험한다”며 “인권위는 혐오표현의 개념과 피해를 알리고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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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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