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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먹거리 공화국]코 묻은 돈과 전두환의 103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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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생’이라 불렸던 전두환 시대에 딱 한번 반장을 했다. 반장이 되었다 하니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반장 엄마는 돈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엄마는 그 두 개가 없었다. 스승의 날과 교사의 소풍 도시락, 각종 성금모금에 ‘솔선수범’을 해야 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크리스마스씰’을 사야 했고, 반장이라면 당연히 한 세트 전장을 구매해야 했고, 고만고만한 형편의 친구들은 마지못해 두 장, 석 장 정도를 억지로 샀다. 홍수가 나거나 연말이면 불우이웃돕기 쌀도 걷었다. 엄마는 4남매가 쌀을 다 갖다 내면 쌀통이 푹 줄어든다며 ‘정부미’ 반말을 들여와 갖다 내라 했다. 영세민이었던 친구는 정부미를 지급받던 형편이었는데 예외 없이 학교에 갖다 내야 했으니 배급받은 정부미 포대에서 한 바가지 퍼냈을 것이다.

경향신문

‘국군장병위문품’도 모았다. 문교부와 국방부가 억지로 짝지어준 1교 1부대 자매결연으로 엮이고 반에는 커다란 우편낭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할당받은 만큼 물건을 채워야 했다. 사탕, 초콜릿, 과자, 과일 통조림, 면도기, 세숫비누, 수건, 치약, 볼펜 등등. 물건 목록을 나열하고 저마다 하나씩은 떠맡았다. 재바른 아이들은 가장 싼 물건부터 맡았고 그때 다 채우지 못한 물건은 부반장과 내가 좀 더 채웠다. 아마 엄마는 물건 중에서도 가장 싼 것으로 애써 구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썼다. 그렇게 긁어모은 위문품을 들고 자매부대를 방문한다. 모으기는 함께 모았지만 어린이 회장단과 그 부모들, 교장만 참석했다.

군 위문 성금과 위문품 모집의 역사는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언뜻 무장간첩과 군위문품 수집이 뭔 상관인가 싶지만 국군의 사기 진작과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반공정신을 심어주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다 1978년부터는 당시 원호처(현 보훈처)에서 국군 위문 사업을 총괄했다.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씨가 군대의 실질적 지배자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때였다. 그러다 민주화의 역량이 쌓여가던 1980년대 말부터 강제징수 논란이 많아 자율참여로 전환되었지만 1990년대 초까지도 많은 학교가 관행적으로 위문품을 모으고 위문편지를 썼다. 아직도 11월이 되면 공공기관에는 국군장병위문성금 모금 공문이 날아든다. 자발적 참여를 내세우면서도 ‘가급적’ 본봉의 0.1% 정도는 내라며 만만한 공무원들에게 뜯어간다. 들쑥날쑥해도 연간 50억 원 정도 걷힌다.

군인 성금 모집 공문이 나돌던 즈음 전두환씨는 알츠하이머라는 불치의 병을 견뎌가며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을 날리고 있었다. 이제 시효가 1년 남은 전두환 일가의 추징금은 1030억원. 전국 공무원들한테 해마다 뜯어가는 50억원을 20.6번 걷을 수 있는 돈이다. 전두환 일가가 축적한 엄청난 재력의 근간은 코 묻은 내 돈이었고 형편 빤했던 부모님의 쌈짓돈이었다. 그때 억지로 걷었던 치약과 사탕이 과연 국군장병 아저씨들께 제대로 전달됐을지 의심스럽지만 이제 묻어둔다. 1986년 국민학생인 내게 뜯어간 평화의 댐 성금 500원은 라면 다섯 개 값이었고, 고급 라면인 ‘신라면’ 두 개를 먹고 하드 하나 더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다시 내놓으라 하진 않겠다. 그래도 그 추징금은 내놓아라. 그 돈만 있으면 국군장병들 삼겹살, 아니 꽃등심 파티도 거하게 하고도 남을 돈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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