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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권력에 줄 댄 관변 전문가 그룹이 대북정책 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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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북정책 옹호에 똘똘 뭉쳐

자리 차지 못하자 비판 목소리도

5년 주기로 치열하게 진영 싸움

일부는 차기 대선캠프 벌써 기웃



공직 진출 조바심내는 북한·안보 전문가 요지경



중앙일보

지난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9.19평양선언을 채택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튿날 부부 동반으로 백두산을 올랐다. 이 때 절정을 보인 남북관계는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냉랭해졌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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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마음이 바빠진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 문재인’ 탄생과 집권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과실을 분배받지 못한 전문가 그룹의 일부 인사들이다. 지금쯤 장·차관 직위나 청와대 요직을 거머쥐어야 2년 남짓 제대로 누릴 수 있지만 감감소식이다. 일찌감치 캠프에 뛰어들어 괜찮은 자리 하나를 낚아챈 동료나 눈치 빠른 후발 주자에게 밀려났다는 불만에 볼멘소리도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늦어도 내년 4월 총선 직후까지를 시한부로 승부를 봐야 할 판이다. 강의나 학문 연구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통일 및 외교·안보 분야의 사례를 통해 입각이나 노른자위 직위를 차지하려 각축하는 친여·관변 성향의 학자·교수 등 전문가 그룹 요지경을 들여다봤다.

한 대학교수나 학자·전문가가 대통령 호칭 뒤에 “~께서”라는 표현을 쓴다면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한다. 머지않아 “~님께서”로 존칭이 바뀌고, 곧이어 청와대나 정부·산하기관 쪽으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지불식 간에 “우리 ○○○ 대통령님께서”라며 ‘연대감’을 강조하는 바람에 속내를 들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식의 자기과시에서 나오는 의도된 실수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대통령이나 유력 대권 후보, 정당 대표급 중견 정치인을 독대한 사실을 떠벌이며 자기 스스로를 누군가의 ‘과외교사’로 은근히 자랑하려 한다면 이미 병은 깊어진 상태다. 대개 여럿이 함께 식사한 걸 ‘독대’로 포장하거나, 자문회의에 참석해 몇 마디 나눈 경험을 개인교습인 것처럼 과장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통일·안보 분야 씽크탱크의 한 중견 학자가 들려준 위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전문가 사회의 웃픈 실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과거 현실 정치에 뜻을 둔 교수를 일컫던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수준을 넘어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참여와 탐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수·학자 등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정치나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학문적 지식이나 경험을 입법이나 행정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적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비중이 과도하고, 노골적인 권력 줄대기나 구애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손실과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학생의 강의권 침해를 들 수 있다. 캠프나 정당의 공개·비공개 자문 회의나 TV출연·세미나 등으로 학문연구라는 본업이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이들을 위해 국민 세금이 허투루 쓰일 공산도 크다.

최근 들어서는 그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정치 참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인사들의 귀띔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에 즈음해 형성된 통일과 외교안보 분야 친여·관변 성향의 학자 및 전문가 그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가장 강력한 파워를 발휘하면서 이미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세력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실무 책임자급에 있던 인물들이다. 아직 자리를 차지 못한 인사들로부터 가장 부러움을 사는 그룹이다. 둘째로는 좌파 성향으로 간주되는 학술단체에 소속돼 활동하면서 주로 외곽에서 정책 논리 개발과 우회적 지원을 맡았던 인사들이다. 셋째는 보수 성향을 보인 직전 정부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문재인 정부의 출범 국면에 뒤늦게 합류한 그룹이다.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핵 보유’와 ‘전술핵 반입’ 등 대북 강경 대응을 주장하던 인사가 문재인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 애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남북 대화와 교류, 경제협력 사업에 방점을 둔 정책과 아이디어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으로 초반 동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세미나와 강연, 방송 출연 및 기고 등을 통해 여론 확산을 꾀했다. 지난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 북한 참가와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으로 국면 전환에 성공했고, 9월 평양 공동선언으로 절정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싸늘해진 북한의 대남 분위기는 이들에게 시련을 안겼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 운운하며 조롱하는 김정은에게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곤혹스런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들 그룹은 주로 10~30 명 규모의 몇몇 SNS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소통한다고 한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 특정 사안이 발생하면 손 빠른 교수·학자가 핵심 내용을 정리해 “이번 건은 어떤 식으로 봐야 된다”거나 “대응책에서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멤버로 활동하다 방을 빠져나왔다는 한 박사급 전문가는 “주로 3~5명이 경협·군사 등 전공 분야 분석이나 의견을 올리면 이를 언론사 기자나 다른 전문가 그룹에 확산시킨다”고 전했다.

두드러진 특징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비난하기보다는 한·미 당국의 대응을 문제 삼고, 북한이 대화를 압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사체 발사’ 등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한 관계자는 “지난달 김정은의 금강산 남측 시설물 철거 발언이 나왔을 때도 북측의 합의 위반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를 ‘관광 재개를 위한 압박’ 수준으로 톤다운 시키려는 논조를 보였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권력에 줄 선 관변 전문가 그룹이 대북정책을 망친다”는 비판도 나온다.

흥미로운 건 최근 들어 이들 가운데 일부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비판적 뉘앙스의 언급을 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무조건 지지입장을 취하던 데서 벗어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나 귀순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해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인사는 더 나아가 청와대와 정부의 대북 및 외교안보 라인 쇄신을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비칠 것을 우려한 때문인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 못 한 청와대 대북·안보 참모진은 퇴진하라”는 요구를 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북 전문가 사이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외교안보라인 교체를 요구하는 건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의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진다.

통일·북한 분야는 남북 간 이념대립 못지않게 남남갈등이 심각한 영역이다. 전문가 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이들 사이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진영논리의 깊은 골이 생겼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가다 보니 제대로 된 정책제안이나 일관성 있는 추진은 어렵다. 손기웅 한국DMZ학회장(전 통일연구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당시 유엔연설과 외신 인터뷰, 국내 주요 행사 축사 등을 통해 DMZ(비무장지대) 평화공원 건설을 공언했다”며 "벽돌 한 장 쌓지 못하고 임기가 끝났지만 책임지는 참모는 없고,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대통령이 DMZ 국제평화특구를 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리 대북정책이 국제 사회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다.

전문가 그룹의 끼리끼리 문화도 폐단으로 지적된다. 학술회의나 토론회 등에는 진보·보수 편가르기를 한 한쪽 성향의 학자·교수만 모인다. 그러다 보니 비판 의견은 없고 늘 하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학술 분야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는 동종교배의 위험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통일부 고위 인사는 "보수·진보 정권에서 일한 통일부 장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게 불가능해져 안타까워했는데, 학계도 이런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 동안 공직 진출을 이루겠다며 전문가 그룹 인사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벌써 다음 정권에 참여할 채비를 하는 발 빠른 사람들도 있다.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 캠프를 기웃거리거나 차세대 여성 정치인 쪽을 향해 시그널을 보내는 전문가·학자 이름이 거론된다. 사활을 건 듯한 5년 주기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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