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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수천억년 타이핑하면…원숭이도 셰익스피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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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일어날 법하지 않은 사건을 이야기에서 접하는 걸 독자와 관객은 싫어한다. 대신 필연성과 인과관계로 직조된 플롯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네 번 연속 로또에 당첨됨으로써 갈등이 해결되는 드라마라면 웬만한 캐스팅이 아니고서야 시청자의 외면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간 '그건 우연이 아니야'는 사실 세상엔 불가능한 불운도 행운도 없음을 수학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우연에 대한 오해를 격파하려는 책이다.

도입부에 삽입한 로또에 네 번 연속 당첨될 확률부터 살펴보자. 18×1024분의 1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1000조년에 한 번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이쯤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며 책장을 덮어버릴 독자가 많을 것이다. 반전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93년 7월 텍사스주에서 복권 540만달러라는 첫 대박을 맞은 조앤 긴더는 이후 몇 년의 간격을 두고 200만달러, 300만달러, 1000만달러에 연이어 당첨됐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를 쳐서 셰익스피어 작품 전체를 완성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1913년 프랑스 수학자 에밀 보렐은 논문에 이 원숭이 문제를 실었다. 결론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2004년엔 가상의 원숭이 역할을 하는 컴퓨터에 아무렇게나 타이핑하도록 시켰더니 'VALENTINE. Cease to…'로 시작되는 문자가 나열됐다. 이는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에 나오는 첫 줄의 최초 열아홉 문자와 동일하다. 물론 시뮬레이션상으로 약 421억×10억×10억년을 타이핑하고서야 나온 결과다. 중요한 건 이 실험으로 우리가 얻는 통찰이다.

"원숭이들이 수천억 년 동안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페이지 전부를 살펴본다면, 분명 우리는 아무렇게나 쳐서 우연히 만들어낸 결과물인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수천억 개의 별들이 수천억 년 동안 아무렇게나 공간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온갖 종류의 사건에 처할 수밖에 없을 터이며 언젠가는 어떤 제한된 개수의 행성계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제임스 진스 경 '불가사의한 우주')

미국 말보로대학 수학과 석좌교수인 저자 조지프 마주르에게 수학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사촌 허먼 형이 권투 시합에서 다운을 당한 뒤 정신장애를 갖게 되면서 '만약 … 라면 피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자신 역시 누군가가 던진 돌에 큰 부상을 입으면서 '만약 돌의 궤적이 1도만 벗어났다면?'이란 물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책은 수학책이지만 저자에겐 아주 철학적인 고민에서 시작된 여정이기도 하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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