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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책과 삶]능력주의로 포장된 미국의 ‘신엘리트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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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강예은 옮김·엄기호 해제

후마니타스 | 420쪽 | 2만원

경향신문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세인트폴의 주류 학생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신엘리트로 성장한다. 신엘리트들은 그들이 손에 넣은 성취는 모두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기회가 많은 이 땅에서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것은 ‘너희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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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부유층 자제들만 입학

150년 된 명문 사립고 세인트폴

지금 ‘특권 의식’은 사라졌지만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자부심


사회로부터 ‘승인’까지 받아

‘건강한’ 상류층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부유층과 ‘연줄’이 작용

‘맨땅’ 출발이 아닌 것이 사실


각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는

최상의 교육시스템 혜택들도

모두 ‘노력의 산물’이라 확신


분명히 미국 사회는 변했다. 과거처럼 부모 신분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문화적으로 계급을 설정하고 그 사이에 벽을 쌓는 일도 어려워졌다. 이제는 구글에서 간단하게 검색만 해도 누구나 ‘고급문화’를 익힐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상류층은 오페라를 보고, 하류층은 힙합공연에 간다는 생각은 촌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엘리트’는 세습되고 있다. 흑인 대통령이 선출돼 재선까지 성공했고 명문 대학에서 인종적·계급적 다양성은 증가했지만 엘리트들은 성공적으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은 꽤 많이 변했지만, 엘리트 구성원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파키스탄 출신의 이민자 아버지와 아일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셰이머스 라만 칸은 1993년 미국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있는 명문 사립고 세인트폴에 들어간다. 1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인트폴은 오랫동안 부유층 자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다. 연간 학비만 4만달러(약 4680만원)가 필요하다. 칸은 외과의사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다. 졸업할 때 동문회 기수 대표로 뽑힐 정도로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그러나 그는 동기들과 달리 아이비리그 지원을 포기하고 리버럴 아츠 칼리지(학부중심대학)인 하버포드 칼리지로 진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엘리트 친구들 사이에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불평등’이었다.

칸은 생각했다. “왜 엘리트 학교교육이 어떤 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왜 어떤 배경의 학생들에겐 학교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쉬운 일인데, 어떤 학생들에겐 끊임없이 악전고투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는가? (…) 이곳 학생들은 계속해서 최고 중의 최고라는 말을 듣는데, 왜 그 최고 중의 대다수는 부유층 출신인가?” 대학 졸업 후 불평등과 계급 문제를 연구해오던 칸은 세인트폴 졸업 9년 만인 2004년 교사로서 모교에 돌아가 그 답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한다.

칸은 11년 전 세인트폴에 입학했을 때 기숙사에서 놀라운 광경을 마주한다. 기숙사 구성원이 온통 흑인과 라틴계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는 칸이 들어간 기숙사가 유색인 학생들을 따로 모아놓은 ‘소수학생 기숙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머지 기숙사들은 명문가 출신 백인 학생들로 채워졌다. 인종차별 정책은 아니었다. 학교는 백인과 유색인종이 함께 기숙사에서 지내도록 할 방침이었지만 유색인종 학생들이 ‘불편하다’며 이를 거부했다. 칸은 2004년에도 기숙사에서 충격을 받는다. 여전히 백인 명문가 부유층이 지배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세인트폴에서는 “빈자와 부자, 흑인과 백인,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한다. 교실과 운동장, 댄스파티와 기숙사, 그리고 심지어 침대에서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백인 부유층 출신이 세인트폴의 주류이긴 했지만 이들은 ‘특권 의식’도 없었다. 자신의 출신이나 배경을 뽐내다가는 되레 혼이 나기 십상이다. 신입생으로 들어온 에번 윌리엄스는 몇년 전에 세인트폴을 다닌 누나 덕분에 갖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다가 교사와 선배에게 바로 면박을 당한다. 윌리엄스가 갖고 있는 지식은 스스로 경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삼촌 등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세인트폴을 다닌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체이스 애벗은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친구들은 애벗이 노력하지도 않고 ‘생득권(동문가족전형)’으로 세인트폴에 입학했다고 판단한다. 피터라는 친구는 칸에게 이렇게 말한다. “쟤(애벗)는 집안 내력만 아니었어도 절대 여기 오지 못했을 거예요. (…) 이 학교가 왜 아직도 저런 애를 받아주는지 이해가 안 가요. 정말 이곳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애라니까요.”

경향신문

책은 신엘리트들이 어떻게 엘리트로 길러지고, 그 자리를 이어받는지 탐구한다. 과거의 엘리트들은 “올바른” 가정교육과 연줄, 문화를 중심으로 자신들 세계를 구축했다. 그들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자원들 주위로 성벽을 쌓고 해자를 두르는 계급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인트폴 학생 같은 ‘신엘리트’들은 스스로를 훨씬 더 개별화된 존재로 생각하며, 현재 자신의 위치가 자신이 해온 노력의 산물이라고 본다.

“신엘리트층은 그들의 유산만으로는 사회적 위계질서의 최정상 자리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고도 생각하며, 자신들의 삶이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도 생각한다. 오히려 근본적인 면에서 보면 그들은 21세기 평범한 미국인들과 다를 게 없다. 즉 그들은 세인트폴 같은 곳에 입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노력이며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갓 이민 온 사람들이나 중산층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누구나 자신들처럼 될 수 있으며 계급 상승의 가능성은 이 나라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이 옳다는 걸 입증해 주는 경험적인 증거라고 여긴다.”

여기까지만 보면 신엘리트는 사회의 ‘건강한’ 중추세력이 된 것 같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차별을 하지 않고, 언제라도 다른 계층이 올라올 수 있도록 ‘사다리’를 유지하는 엘리트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인 상류층 모습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라면 이 책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세인트폴의 주류 학생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엘리트로 성장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티를 내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라 여긴다. 허드렛일을 하는 교직원들과도 격의없이 지내고 교사들과 꾸준히 친밀감을 쌓는다. 무엇보다 ‘엘리트 문화’를 몸으로 익히는 데 애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식당에 모여 한껏 차려입고 격식을 갖춘 만찬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이런 자리에서 편안하게 정장을 소화하는 법에서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법, 선생님과 식사하면서도 불안해하지 않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문화나 취향은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진짜’ 엘리트다.

이렇게나 ‘노력’을 해왔으니 신엘리트들은 그들이 손에 넣은 모든 성취는 모두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거칠 것이 없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기회가 많은 이 땅에서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것은 ‘너희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쟁취한 성공은 맨땅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동문가족전형으로 입학한 애벗을 비난했던 피터는 코네티컷의 부유한 동네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엘리트 교육기관과 연줄이 있었고, 부모님은 하버드에서 만난 커플이었다. 피터는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내 노력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입학할 때만이 아니다. 세인트폴은 거의 모든 학생을 몇몇 분야에서는 최상위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세인트폴 학생수는 500명에 불과한데 100개에 달하는 공식 조직과 그보다 훨씬 많은 비공식 조직이 존재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학생들이, 특히 졸업반이 되는 해에는 이런 그룹 중 하나를 운영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폭넓게 개설돼 있는 교과목들도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분과에서 뛰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인트폴 학생들은 어느 한곳에서는 최고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한다. 이렇게 신엘리트들은 ‘노력’을 통해 위계를 세습하고, 사회로부터 ‘승인’까지 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공정’과 ‘능력주의’로 포장된다.

책의 부제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새로운 엘리트 만들기’이다. 한국어판을 낸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자료에 따르면 세인트폴은 한국의 재벌2세들이 선호하는 학교로도 유명하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아들 김동관·김동원, 효성그룹 조현준 회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아들이 세인트폴 출신이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한국어판 해제에서 “미국과 그 양상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엘리트들은 사회를 지도하는 데 무능하고 그 지도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하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 책이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구조변동과 동시에 한국 엘리트들의 무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영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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